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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 물의 연보

 

쇼펜하우어 필경사, 천년의시작

 

 

 물고기들이 꿈을 전시하고 있다

 꼬리는 어디서나 묵행할 골목을 유영한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눈을 쌓은 나무는

 얼음물 바른 봄 속으로 둥글게 걸어갈까

 

 강안은 누군가 수없이 던진 말을 챙기느라 구불구불

 그 아름다움에 유속 빠른 기분이 파고든

 왕버들이 떠나간 자리

 자동차 바퀴에 순해진 검은 길 같다

 

 어지럽게 갈라진 우리의 손금을 떠난 촛불이

 방생의 물길을 나서는 것은 멀어질수록 좋은 기억 때문일까

 

 물고기가 물 건너간 소문은 온 세상 과녁에 몰두하고

 화살 없이도 조용히 녹조가 부글부글 죽음에 전념한다

 

 흐르는 강물이 흐르지 못하듯 흐르는 것은

 빗방울을 만나 분연히 일어서고픈 이유이다

 

 귀를 닫아도 들리는 수억만 년 전의 물보라의 선율

 우리의 몸속 물고기에게 빚을 독촉하는 햇빛은 짱짱하다

 

 물 안팎 시체의 향수가 끄는 인력에 출렁대며

 우리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물의 포옹

 눈물마저 마른 그날

 모래만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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