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없는 것이 식탁에 놓여 있어서 몹시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가령 마지막 월급 받은 날 황학동 27번지에서 산 청동 촛대라든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소포로 보내온 접시 두 개에는 성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가끔은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하다 그만둬버린 여자들, 그들이 꺾어온 꽃들, 노란 숟가락, 편지칼, 슬프게도 한 열흘씩 집을 비우고 난 뒤에는 푸르른 곰팡이들이 피어 햇살의 경계를 핥고 있었다. 여명이었고, 고양이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한, 여자의 혼잣말은 지금도 들릴 것 같다.
공포를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나 단순한 일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당신은 나를 좀더 평화롭게 어루만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나는 곧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에게 더 슬퍼 보일 것이 두려워 그만 여기서 결별하자고 주문했다.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라고 당신은 드라마를 보며 말했다. 그건 사실 영국의 축구 경기였다. 노동과 알약 같은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린 너무 순수했거나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새벽 2시에만 문을 여는 이태원의 헝겊 가게를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은 어떤 과거를 보관하기 위해 모든 것에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가. 나 또한 고요한 것은 진실 이전의 일이라 믿는다. 당신의 불편과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오늘 내가 식탁 위에 준비해둔 음식을 보라. 멀고 푸르고 뜨겁고 단단하고 검고 빠른,
아름다운 세월을 다시 살 수 있을 거라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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