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들려오고
저기서도 들려온다
어느 날 열람실에 숨어든 한 마리 귀뚜라미
쉼 없이 울어 대고 귀뚜라미 발자국이 논문 대신 내
노트에 찍혔다 희미해지는 가을
누가 떠드는 거라면 가서 좀 조용히 하라고
말이라도 해볼 텐데 어디서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귀뚜라미에게 가서 좀
조용히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여서
하는 수 없이 듣는다 두 귀에 선명히 찍혀 오는 소리
인간아
너 같은 게 공부는 해서 뭣하니
갇힌 귀뚜라미 한 마리
백지 위에 크게 가을이라고 쓰고
고요 속에 줄이라도 그어 대듯
울어 댄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밖에 있는 것 같고
책상 전체가 가을의 풀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만 같아서
나 혼자만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거기
앉이 있는 것만 같아서
도저히 그냥 앉아 있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면
바깥에선 더 많은 귀뚜라미들이 울어 댄다
다음날 네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면
우린 귀뚜라미 소리 따윈 까맣게 잊고
다시 학업에 열중하게 될 테지
논문을 완성하고
보란 듯이 졸업모를 쓰고
교정을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길 테지
누구는 아마 교수도 될 거야
그러나 정년 후에도 이따금씩
멈추지 않고 들려올 소리
귀뚜라미 소리로 인해 우린 들판에도 있었다가
다시 열람실에도 있게 된다
여기서도 들려오고
저기서도 들려오는
달빛의 테두리 같고
A4 용지의 백색 같은
부러진 다리 하나의 고요함
물에 떨어뜨린 한 방울
침향의 맑음 같은
유리창에 묻은 차가운 얼룩
잠시 귀뚜라미 소리 적혔다
사라진다
주점이 끝난 새벽의 교정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버스 정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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