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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첩첩산중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나 거기 내 눈과 귀를 두고 왔네

 내가 두고 온 눈이 바다를 보고

 내가 두고 온 귀가 파도를 듣고 있다니

 그것들은 아직 내게 매달려 있는데

 나는 거의 그날 해변가에 서 있던 펜션이 되어 가네

 지금은 새벽이고

 그토록 가시적이고 전면적인 해무라니

 수평선 너머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바다가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올려 바람에 날려보낸 것들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

 그날

 양양의 하조대

 바위 위에 붙어 있던

 수령 200년 된 소나무 한 그루

 파도 소린 저녁부터 들려왔고

 새벽에도 들려왔고

 아침에도 들려왔네

 자꾸 뭘 두고 온 것만 같았는데 

 두고 오길 잘했지

 핸드폰 충전기는 안 들고 가길 잘했네

 핸드폰이 꺼지자 며칠째 바다와 너와 나...... 그리고 파도 소리만이 남았지

 나는 이곳에 다른 여자와 온 적이 있고

 너는 이곳에 다른 남자와 온 적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이곳에 온 적도 있게 된다

 1층이었던 우리가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 1층으로 나란해졌고

 네 엉덩이에 치던 물결도 모두 멎었지만

 기억은 엉덩이 같군

 엉덩이라면 누구의 엉덩이라도 푹신할 것이다

 첩첩산중 속

 하나의 기억

 몇 개의 연합된 기억처럼

 그 안으로 쑥, 빠져들었다

 다시 쑥, 빠져나올 것이다

 손으로 갈기면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붉은 손자국을 가질 것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 끝에서 만난 절대 수평

 첩첩산중은 참 좋은 말이야

 중첩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있었으므로

 첩첩산중으로 기어들어 가는 버스 안에서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마다 

 거기 놓이는 건 삶의 무게였고

 삶이 널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네가 두고 온 눈과 귀가 삶의 무게로 흔들리고

 네 눈과 귀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무게로 바다는 흔들리겠지

 첩첩산중에서 기어나올 때 차창 밖 어두운 산맥이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엉덩이가 하릴없이 내뱉던 하품

 구멍 주변에 난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는 기분으로

 하나는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어차피 다 들고 올 수도 없는 거 

 두고 오길 잘했지

 들고 온 것도 마저 여기 두고

 다시 더 많은 걸 두러 가야만 하고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걸 두고 오다 보면

 결국 모든 걸 두고 가야 할 때가 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아끼지 마

 나를

 빈 나뭇가지 위에서 놀다 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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