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거기 내 눈과 귀를 두고 왔네
내가 두고 온 눈이 바다를 보고
내가 두고 온 귀가 파도를 듣고 있다니
그것들은 아직 내게 매달려 있는데
나는 거의 그날 해변가에 서 있던 펜션이 되어 가네
지금은 새벽이고
그토록 가시적이고 전면적인 해무라니
수평선 너머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바다가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올려 바람에 날려보낸 것들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
그날
양양의 하조대
바위 위에 붙어 있던
수령 200년 된 소나무 한 그루
파도 소린 저녁부터 들려왔고
새벽에도 들려왔고
아침에도 들려왔네
자꾸 뭘 두고 온 것만 같았는데
두고 오길 잘했지
핸드폰 충전기는 안 들고 가길 잘했네
핸드폰이 꺼지자 며칠째 바다와 너와 나...... 그리고 파도 소리만이 남았지
나는 이곳에 다른 여자와 온 적이 있고
너는 이곳에 다른 남자와 온 적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이곳에 온 적도 있게 된다
1층이었던 우리가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 1층으로 나란해졌고
네 엉덩이에 치던 물결도 모두 멎었지만
기억은 엉덩이 같군
엉덩이라면 누구의 엉덩이라도 푹신할 것이다
첩첩산중 속
하나의 기억
몇 개의 연합된 기억처럼
그 안으로 쑥, 빠져들었다
다시 쑥, 빠져나올 것이다
손으로 갈기면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붉은 손자국을 가질 것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 끝에서 만난 절대 수평
첩첩산중은 참 좋은 말이야
중첩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있었으므로
첩첩산중으로 기어들어 가는 버스 안에서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마다
거기 놓이는 건 삶의 무게였고
삶이 널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네가 두고 온 눈과 귀가 삶의 무게로 흔들리고
네 눈과 귀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무게로 바다는 흔들리겠지
첩첩산중에서 기어나올 때 차창 밖 어두운 산맥이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엉덩이가 하릴없이 내뱉던 하품
구멍 주변에 난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는 기분으로
하나는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어차피 다 들고 올 수도 없는 거
두고 오길 잘했지
들고 온 것도 마저 여기 두고
다시 더 많은 걸 두러 가야만 하고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걸 두고 오다 보면
결국 모든 걸 두고 가야 할 때가 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아끼지 마
나를
빈 나뭇가지 위에서 놀다 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유원 - 가을 축제 (0) | 2020.11.23 |
---|---|
황유원 - 모두가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있었다 (0) | 2020.11.23 |
황유원 - 많은 물소리 (0) | 2020.11.23 |
황유원 - 사랑하는 천사들 (0) | 2020.11.23 |
황유원 - 1시 11시 (0) | 2020.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