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쓰고 한참을 멍하니 걷다 문득
앞을 보면
너의 상반신은 잘려 있고
내리는 비에 바지 밑단은 젖고 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그렇고
우산을 이리저리 기울여 봐도 그런데
쉼 없이 걸어 올라가는 너는
종아리가 참 예쁘다
너는 발목이 참 가늘고
너의 발목은 점점 가늘어져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인데
이제 이 비는 아무 쓸모가 없어
이 비는 이제 아주 조용히 걸어 다닌다
아무 기척도 없이 신발 밑창으로 스며들어
양말이 젖고
발바닥이 젖고
지금 이 시간은 점진적으로 고요해지고
전반적으로 차분해져서
넘치는 너는 바지 위로 퍼지고
낙담한 너는 바지 밑단에 고여 아래로 뚝 뚝
떨어지는가
로비로 들어와 우산 접으면 잠시
사라지지만
밖에선 여전히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들
어디도 잘리지 않은 채
맑은 날 함께 오르내리던 언덕을
이제 너 혼자 온종일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젖은 복도를 지나
천천히 상층부로 걸어
올라갈수록
바지 끝을 붙잡고 질질 끌려오던 너의
젖은 손은 희박해지고
평소엔 몰랐는데
비만 내리면 드러나는 부위들
잠시 비 그친 옥상에 오르면 파인 곳마다 반드시
고여 있던 너
내일이면 하늘은 그런 너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전부
데려가시겠지
어두운 곳에 고인 네가 가장 늦게 사라질 뿐
잠시 그쳤던 비
다시 내리면
이 비는 다시 차갑고
이 비는 소리와 영상을 반복한다
모든 비는 동어반복이지만
동어반복 따윈 없다고
중언하고
부언하며
발목 없는 비는 이제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미소 지으며
천천히 옥상 아래로
뛰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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