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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많은 물소리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우산 쓰고 한참을 멍하니 걷다 문득

 앞을 보면

 너의 상반신은 잘려 있고

 내리는 비에 바지 밑단은 젖고 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그렇고

 우산을 이리저리 기울여 봐도 그런데

 쉼 없이 걸어 올라가는 너는

 종아리가 참 예쁘다

 너는 발목이 참 가늘고

 너의 발목은 점점 가늘어져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인데

 이제 이 비는 아무 쓸모가 없어

 이 비는 이제 아주 조용히 걸어 다닌다

 아무 기척도 없이 신발 밑창으로 스며들어

 양말이 젖고

 발바닥이 젖고

 지금 이 시간은 점진적으로 고요해지고

 전반적으로 차분해져서

 넘치는 너는 바지 위로 퍼지고 

 낙담한 너는 바지 밑단에 고여 아래로 뚝 뚝

 떨어지는가

 로비로 들어와 우산 접으면 잠시

 사라지지만

 밖에선 여전히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들

 어디도 잘리지 않은 채

 맑은 날 함께 오르내리던 언덕을

 이제 너 혼자 온종일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젖은 복도를 지나

 천천히 상층부로 걸어

 올라갈수록

 바지 끝을 붙잡고 질질 끌려오던 너의

 젖은 손은 희박해지고

 평소엔 몰랐는데

 비만 내리면 드러나는 부위들

 잠시 비 그친 옥상에 오르면 파인 곳마다 반드시

 고여 있던 너

 내일이면 하늘은 그런 너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전부

 데려가시겠지

 어두운 곳에 고인 네가 가장 늦게 사라질 뿐

 잠시 그쳤던 비

 다시 내리면

 이 비는 다시 차갑고

 이 비는 소리와 영상을 반복한다

 모든 비는 동어반복이지만

 동어반복 따윈 없다고

 중언하고

 부언하며

 발목 없는 비는 이제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미소 지으며

 천천히 옥상 아래로

 뛰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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