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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레코드의 회전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빌리 홀리데이, 그렇게 불리는 병이 있다면

 속에 담겨 푹 익어 가고픈 휴일이야

 그동안 당신이 부른 노래를 전부 병에 담아 익히면

 어떤 맛의 병조림이 될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럴 때 미래는 우리가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는 병조림 속 피클이어서

 그것은 선반 위에도 있고

 찬장 안에도 있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 그렇게 불리는 병이 있다면

 그 모든 불치병에 걸려 남몰래 죽어 가고픈 나날들

 삶은 본래 뻔한 거지만

 가장 뻔한 가사를 가장 곤란하게 부르는 게 가수지

 나와 나 사이를 아주 멀게 하는 생각들이

 나와 나 사이의 다리들에 활활 불을 질러

 불덩이가 되어 버린 다리가 강 위로 힘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

 나와 내가 이렇게 서로 기댄 채 구경하며

 함께 노래하지 않으면 좀 곤란해

 누가 뭐래도 가장 부르기 곤란한 가사를 가장

 느긋하게 부르고 있는 게 가수고

 당신은 벌써 죽었는데

 버젓이 산 채로 당신 노래를 듣고 있는 내가 이다지도 곤란해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웃긴 노릇이 아닌가

 자꾸 그렇게만 여겨져서

 빌리 홀리데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불리는 병이 있다면

 들고 한 번에 다 마셔 버린 후 밖에 나가 좀

 걷다 와야만 할 것 같은 휴일이야

 고작 빈 병 하나로 무얼 할 수 있겠어?

 병 속에 편지라도 쑤셔 넣고 떠내려 보낼 작정이 아니라면

 거기 한 송이 꽃이라도 꽂아 줘야지

 그걸로 누군가의 대가릴 후려칠 용기마저 없다면

 강변에 핀 치자꽃이나 한 송이 꺾어 머리에 꽂아 준 다음

 볕 잘 드는 창가에 놓아 줘야지

 그러면 어느새 취해 버린 꽃은 다시 무대에라도 오른 양

 온 방안에 넘실대고 있고

 너나 나나

 인간은 하나의 소음

 그건 자기 전에 끄는 불처럼 한번

 꺼 볼 수도 없어서

 둘 다 술이 확

 깰 때까지 나도 같이 실실대면서

 옆에서 그걸 가만히

 지켜봐 줄 수밖에

 침대 위에서 밤새 뒤척이는 사람의 구겨진 이불이 그리는

 선들의 궤적으로

 오래된 베개 냄새 풍기는 강이 머리 둘 곳 찾아 밤새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음성으로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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