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유원 - 풍차의 육체미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 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 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 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를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 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밭 오가는 꿀벌들의 날갯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 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 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 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응 브응

 소리를 녹음해 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 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 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유원 - 간단한 몇 가지 동작들  (0) 2020.11.20
황유원 - 새들의 선회 연구  (0) 2020.11.20
황유원 - 북유럽 환상곡  (0) 2020.11.20
황유원 - 루마니아 풍습  (0) 2020.11.20
이영주 - 마흔  (0) 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