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 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 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 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를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 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밭 오가는 꿀벌들의 날갯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 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 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 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응 브응
소리를 녹음해 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 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 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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