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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표백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장욱 시집, 문학과지성사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이장욱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천국보다 낯선:이장욱 장편소설, 민음사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이장욱 시집, 현대문학 혁명과 모더니즘:러시아의 시와 미학, 시간의흐름

 

 

 나는 어딘지 몸의 빛깔이 변했는데

 내가 많이 거무스름하였다.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잘 표백을 시키고

 

 너무 백색이 된 뒤에는 침묵하였다. 당신이 추측을 했는데 저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존재해도 허공을 닮을 뿐입니다, 저런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나를 의아해하였다. 있다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에 흡사하다고.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것이 떠오르는데 가령

 당신의 키와 면적

 다리의 각도

 먼 불행의 접근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거울은 아니지만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골목이 아니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러 한꺼번에 거대해지는

 

 어둠을 닮은 것으로서

 소리라든가 공기라든가 시간과 같이 무섭게 스며들어 고요하다가

 갑자기 확대되는 것으로서

 

 나는 천천히 표백되었다. 조금씩 모든 것이 되었다.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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