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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림 - 18

 

세 개 이상의 모형:김유림 시집, 문학과지성사 양방향:김유림 시집, 민음사

 

 

 당신이 예상한 대로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무가 울창해진다. 머리를 스칠 정도로 무겁게 늘어진 나무를 볼 수 있다. 보라는 들개터널을 지나 스트로베리 마을로 들어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스트로베리처럼 작고 동그랗습니다. 조심히 다뤄주세요. 우리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스트로베리라고 부릅니다. 스트로베리 마을 촌장. 스트로베리!> 마을 어귀의 표지판을 지나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혹은 상상하고 싶은) 모든 형태와 향기와 질감을 가진 스트로베리 마을의 정경이 펼쳐진다. 우편에 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을 수도 있고 좌편에 작은 언덕들이 물결처럼 부드럽게 솟구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강 한 줄기? 보라는 두렵지 않다. 이런 마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이 익숙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괜찮아요.>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농로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스트로베리 마을 아이 하나가 말한다. <나는 스트로베리는 아니에요. 스트로베리에 만족하는 스트로베리죠.> 시나몬? 어떤 향기가 농지 맞은편 다리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스트로베리지요.>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니다. 보라는 이 작은 스트로베리가 어쩌다 자신의 길잡이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코에 닿은 익숙한 향기에 집중하고 싶다. <물론 어제의 스트로베리가 오늘의 스트로베리가 되는 건 아니에요.>

 익숙한 정경 속에는 언제나 집 한 채가 있을 것이다. 보라와 보라의 일행은 스트로베리를 따라 허리를 굽힌 채 집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는 저와 함께 이곳 스트로베리에 사는 스트로베리예요.> 또 다른 스트로베리는 팬케이크를 굽다 말고 금보라를 열며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스트로베리가 스트로베리하지 않나요?> 보라와 보라의 일행은 어느새 스트로베리!라고 외칠 뻔한다. 당신이 여기 있다면 당신은 실례가 되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는 태도로 집 안을 둘러볼 텐데. 사실 당신은 이미 여기에 있다. 이미 여기에 있지만 너무 눈에 띄지 않으려다 아예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스트로베리와 스트로베리는 보라가 들려주는 세상의 기묘한 이야기를 즐겁게 듣는다. 하나의 사물이 하나의 사물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둘이나 셋이다. 스트로베리는 스트로베리를 덧붙여서 하나의 스트로베리를 만들거나 하나의 스트로베리로 보이는 둘의 스트로베리를 만든다. 스트로베리 여기 스트로베리는 제 스트로베리가 물려준 스트로베리입니다. 스트로베리하죠?

 보라는 이 작고 동그란 스트로베리의 스트로베리 그러니까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스트로베리! 그리고 그 다음은...... 스트로베리로 만든 발효주를 마시고 스트로베리로 만든 스트로베리를 먹는다. 마시고 또 마시고 스트로베리를 스트로베리하고...... 스트로베리한다. 스트로베리는 스트로베리를 스트로베리한 것이다. 스트로베리했다고? 응. 보라는 보라의 곁을 오래 지킨 내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렇게 해석했다. 스트로베리의 바깥에 있는 스트로베리한 스트로베리에 스트로베리가 뜨고 스트로베리와 보라는 스트로베리를 피우고 그 주변에서 스트로베리하며 스트로베리하고 스트로베리했다. 스트로베리. 스트로베리 스트로베리 스트로베리. 스트로 스트로베리 이건 보라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이 여기서 끊긴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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