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소형 - 귀

 

숲(ㅅㅜㅍ):김소형 시집, 문학과지성사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아침달

 

 

 그리고 너는 귀를 내밀었다

 희멀건 귀와 마주하고 있으니 삐쩍 마른 몸에 들러붙은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네 귓속에는 백양나무와 살찐 암말이 있어, 내가 말하자 귀가 움찔거렸다 말똥이 뒤섞인 초콜릿 깔린 길이 있고, 그 위에서 뛰어다니는 쌍둥이 소녀가 있고, 하품을 하며 하나의 계절을 산책하는 남자가 있네, 그러자 귀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그 안에 뭔가 더 있어, 나는 귓바퀴를 잡아당기며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네 귓속에 묻힌 묘지를 보았다

 여긴 정말이지 조용하고 아름다워, 너는 비석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사라진 소리들이 햇살을 받으며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저기 내 이름도 있어, 네가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면 저곳에 눕게 될 거야,

 그땐 난 뭘 하고 있을까.

 정원을 가꾸듯이 닦으면서 기다리겠지, 내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네 귓속에서 잠들 거야, 그러자 너는 다시 귀를 내밀었다 귀에다가 속삭인다는 건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래, 귓볼을 매만지며 수줍게 말하던 너의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소형 - 휜  (0) 2021.04.05
김소형 - 두 조각  (0) 2021.04.05
김소형 - 습관  (0) 2021.04.05
김소형 - 일월  (0) 2021.04.05
김소형 - 깊은  (0) 202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