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비의 근황
소식을 접했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너의 의지이다
속삭이면서도 단호하여 내게만 들렸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떠날 채비를 마치자 겨울이 왔다 가져갈 것은 오직 눈보라를 꿰뚫어 볼 눈동자뿐이라는 듯
두고 가라
명령입니까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따르기로 한 건
몇 번의 계절을 거칠지 몰라 골고루 집어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와 노트와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한 소설책 한 권 정도의 여행 가방 목록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길을 나서야 할 운명의 목록은 하늘을 뒤덮은 눈송이보다 기껏해야 한 칸 정도 모자르다 죽음 이후에 대한 칸은 비어 있었고 스스로 정할 수 없는 두 기념일 사이에서 내 생은 무수하였다
이적한 거겠지요 택시 기사는 통화 중이었다 왜 옮겼는지는 가 보면 알겠죠
나도 모르는 생이 있었는지 소식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은 달 같아서 스스로 빛나지 못하니까 죽어 간다는 끝말에 나는 지금까지 우울한 기계였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찾아가 봐야겠지요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계시는
어두워진 도시에 잠입하는 눈송이처럼 은밀하다
하루 종일 불안했지만 늘 앓던 증상이었다
2. 초대받은 사람들
또 하루 지났다 나는 정작 갈 데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낸 곳을 알 수 없는 소식이었으니
무책임합니다 너도 그렇게 살아왔냐는 힐난을 무시한 적 있었기 때문입니까
어떤 삶은 방임되었다 거리에서 다 늙었다
배회의 끝은 언제나 용납이었고
왠지 끌려
아무 곳도 아닌 곳에 도착해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 틈에 서 있지만 꼭 경유해야 할 곳이라는 느낌 이 사람들은 미래에 있었던 것이고 이들에게 나는 다가올 과거였고 고궁의 담장에선 끝내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린 벽돌이 여전히 담장을 지탱하고 있어 여기 며칠 더 머물려고 해 어디로 갈지 알려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돼 연락은 잠시 끊을게
소식을 들었다면 초대받은 것이다
얼마나 수줍은 누설인가
방금 스쳐 간 사람도 초대를 받았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도 한 명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도시 귀퉁이 어느 술집에 앉아 있다
모두가 목적지가 제각각인 동궤에 와 있다
3. 누구에게나 전조
저녁의 골목에서 바람에 휩쓸리는 신문지 소리를 듣고 있을 때
택배로 온 상자 속에는 모래 한 줌이 들어 있었다
편의점 문을 나서는데 아구찜 팔던 식당은 부대찌개 집으로 바뀌었고
방금 산 담뱃갑은 비어 있었다
사라진 날들이 있다고 믿고 싶어도
복원할 이유도 없는 흔한 날들이 이어졌다
문득 집어 든 신문지에는 오늘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되돌아 온
반복을 반복하여 아스팔트의 퇴적층이 쌓이고 옥상에 옥상이 올라서고
무덤 위에 무덤 산꼭대기에 바다 인공위성의 잔해가 표류하는 대기권의 제국
어디 갔다 왔냐는 말에 잘 살아왔냐고 말해 준다
몇 번을 다시 시작했는지 모를 연대기의 끝에서
소스라치며 깨어나던 꿈의 끝자락에서
택배로 온 모래가 모래가 되기까지의 잠깐의 간극을 평생 살아가는 중이라고
말해 준다
다음 꿈에선 나이를 조금 먹었겠지
자주 현란하였다
4. 선연
그건 앵두나무였다 앵두 한 알을 따면 수백 알의 앵두가 눈을 떴다 발랄했던 강아지 이름은 해피 지붕에 드나드는 쥐를 못 잡아 안달이던 고양이와 장난치다 밥그릇 엎기 일쑤였다 자주 놀러 왔던 녀석은 책 빌려 가는 재미가 붙었다 책귀신이라고 별명을 불러 주면 환하게 웃던
그들은 모조리 죽었다
돌려받지 못한 책에는 신비하게도 잊어버린 기억이 모여 사는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잘 보존되어 있고 잘 살고 있다 기억은 중립적이어서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때론 자신의 기억을 찾아 마을에 오는 이도 있다는데 결말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이 기억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신비라는 수식어는 비극에 어울린다 신비한 질병 신비한 고통 신비한 아픔 신비한 죽음 지워진 기억은 신의 비밀에 속해 있다 기억할 만한 기억도 사라져 버리면 안 되어서 떠나보내고 그조차 잊는다
누군가 생을 마감할 때면 마을에서 소환되는 기억도 있다
너 나를 생각해 낸 거니
방금 전까지 잊고 있었는데 삼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그녀 얼굴이 뚜렷이 떠오른다
너 지금 죽었니
5. 주말의 명화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어릴 적 보았던 서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애절하게 남자를 바라보는 그 얼굴
순수하고 가녀리고 지금도 설레는
흑백영화인지 금발인지 모르겠고 제목도 알 수 없어
애꾸눈 잭일 것 같았지만 커티 주라도가 비슷한 표정으로 나왔지만 아니었다
셰인 관계의 종말 무숙자 장고 튜니티 석양의 무법자 서부영화는 아니지만 진홍의 도적 바라바 뒤져 봐도 기억 속에 사는 그녀는 없었다 영원하려면 찾지 말라는 듯
어느 도시도 아닌 어떤 도시도 아닌 도시에 숙박 중이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끝없는 글을 쓰다 창밖을 바라본다 작년에 이어서 눈이 내린다 시간은 봄부터 가을까지 늙다 잠시 멈췄다 나는 갑자기 어린아이였다가 청년이었다가 한다 저렇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적멸 필름 영화처럼 긁힌 상처가 흩날리고 거리의 소실점으로 빨려 가는 남자와 여자의 뒷모습 내게 남을 최후의 장면은 눈을 감은 설원의 지평선이다
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나는 그 장면에 있지만 그 장면에 없는 사람 별은 수명을 다해도 별이 되고 저녁이면 다시 살아나는 가로등의 영생은 말하자면 유목 신비하지 실종은 불멸에 이르렀다는 거
도시는 아련해진다 엔딩
6. 가까워진 경계에 서다
앞서간 자의 발자국을 뒤덮은 눈밭을 걸으면
내 어느 발자국이 희미하게 겹치고
걸어다니는 존재의 기억은 기억에 망각된다
가 보지 않은 길을 걷는 중이므로 나는 나에게 예언
설국에서는 눈 한 송이마다 영토다
전위의 달빛을 묻으며 눈이 쏟아져 인간계 지워지다
두려움은 일어날 일 때문이 아니라 일어난 일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설국에 적힌 생의 기록이 사라지면 나는 무겁의 국경을 넘어설 것이다
눈밭에 발자국을 찍는 것은 점안식을 치르는 것 같아서
살아난다 죽는다 살아난다 죽는다
바라건대
받아들일 용기를
7. 핍진
같이 바라본 별자리를 나는 잊었다
밤하늘에 쓰인 신화를 읽어 주며 느끼던 얼굴과 숨결과 체온을 잊었다
너에 대해 가난할수록 너에게 가까워지리라
텅 비었으므로 기진하여 아무렇게나 별들을 잇는다
천문학에 따르면 지금의 우주는 두 평행우주가 충돌하여 다중 접점에서 파생된 입자들로부터 탄생했다고 한다 시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우주는 광속으로 번져 가는 중이라고 허블 망원경 덕분에 우주 생성 초기의 빛을 보게 되었다는데 우린 백오십억 년을 달려온 빛의 후예라는 게 밝혀졌지만 나 죽으면 몸에서 빠져나간 입자는 다시 얼마나 가야 하는지 그러다 지금의 우주 이전에 있었던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고 그전에는 또 그전에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가 궁금해지다 왜 생겨난 것일까가 더 궁금해지는 것이다
핍진했다
그러므로 핍진했다
이 길의 극단까지 가야 한다는 맹목의 기원은 알 수 없다
우주는 원래부터 있었다는 결론으로 대신하기로 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맹목의 끝을 나는 안다
좀 전에 생긴 별자리가 인도하는 전방위로 향한다
8. 영원의 하루
그날 돌이킬 수 없는 사상의 지평선에 들어선 것이다
기억의 중력에 이끌려 바람 따라 한 방향으로 휘어진 갈대처럼
지그재그로 날아가지만 그 항로가 꽃과 꽃 사이를 잇는 최단 거리인 나비처럼
온 것이다 오래 걸렸으나 오래되진 않았다
기억에 다가갈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구름을 떠난 눈송이가 창가에 내려앉을 때까지 세상은 몇 번을 종말했던 것일까
체로키 부족은 땅이 거대한 섬처럼 물 위를 떠다닌다고 믿었다
땅의 네 극점이 수정 천장에 밧줄로 묶여 있어
밧줄이 점점 낡아 끊어지면 땅이 물속에 가라앉는 종말을 맞이한다고
그러면 예전에도 그랬듯 신이 땅을 끌어내 다시 세상을 창조한다고
오늘 종말에 대한 꿈을 꾸고 눈을 떴지만 영원 속에서는 일 초도 흐르지 않은 하루
베란다에서 아침 햇살을 끌어당기는 어린 화초는 벌써 반백 년을 살았고
창가엔 눈이 쌓였다
기억은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9. 기억들
뛰노는 기억들
슬퍼도 평화로운 기억들
더 자라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아
시간보다 길고 시간보다 짧은 기억들
깨진 나날의 조각에 비친 수천의 달들
달뜬 얼굴 속삭임 손짓
개울가 낙엽 지지 않는 버드나무
빨래 소쿠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의 노란 하늘
함께 수평선을 바라보았으므로
고백은 수평선에 대고 한 것이다
그대에 대한 기억은 나에 대한 기억보다 생생했고
기억해 내려면 다른 기억은 잊어야 한다
은밀한 공유는 둘이 거닐던 바닷가도
풍경 소리 흐르던 사원도 지워진
불가능한 배경을 떠돈다
영원의 기억에는 필멸이 필요했다
뛰놀다 잠든 기억들
부스스 눈을 뜨는 기억들 사이에
나 살았다
기억이 말을 걸면 이력을 다시 써야 한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닌 내가 있는 것이니
10. 메멘토 모리
실은 처음이 아니었어
사라진 기억을 찾아온 게 이번만은 아니었어
오고 갈 때마다 오고 간 기록이 지워진 것
기억의 신이 선사한 배려지
잊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무너져 버렸겠지
그리하여 기억은 온전히 살 수 있고
기억의 뿌리로부터 나 역시 온전히 살 수 있고
살다가 또 어느 날 문득 지나간 시간을 찾아 나서겠지
미래는 기억이 만드는 거야
죽어 간다는 소식은 나에 대한 소식이었어
수수께끼지 누구나 기억하고 있지만 아직 생기지 않은 기억은
죽음
그런 거야 언젠가 새 세상이 만들어지는 듯 첫눈이 내리는 날
괜한 그리움
설렘
공허
불가항력 같은 느낌에 휩싸인다면
소식을 받은 거지
삶은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