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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 top note 외 9편 (2021 파란 신인상 시)

 <top note>

 집집이 놓인 과도를 하나씩 훔쳐 와

 긴 칼날은 필요 없어
 손잡이와 같은 길이면 적당할 것 같아

 볕이 잘 들지 않는 바닥에
 유자, 라임, 레몬,
 오렌지, 자몽, 귤들을 쏟고서 주저앉아

 가장 보기 좋은 단면을 찾아 주자

 열매에서 꽃 모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주어진 방향대로 쪼개진 일상이
 하얀 줄들을 벗길 때
 손금 읽는 법도 가르쳐 줄게

 오래 쓴 도마 같은
 네 손이 피할 수 없던 악수들

 썰리지 않은 환대가 파과처럼 섞여 있다



 <스톰 체이서>

 좌판 위로 가득 쌓아 올린 꽈배기와 찹쌀도너츠

 바람은 그 모든 모양새를 망치고
 햇살은 무색해지지 않으려 설탕을 녹이고
 나는 그런 모양으로 있는 것들이 좋다

 졸음을 가누지 못하는 앞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보다가
 버스 유리창 실금으로 파고드는 햇빛을 보다가
 무지개를 보는 일

 빗금의 속도로 무지개가 새겨진다면

 제 방향으로 틀어지다가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 도착해
 아무 일이나 만드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각도로 떨어지는 손금들

 자주 주먹을 쥐었다 펴면
 선명한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지독한 바람에겐 이름이 붙듯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 싶을 때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걸어오는 길에서
 동물과 가축, 짐승의 시선을 기다린다

 그 어떤 눈도 해를 똑바로 볼 수 없으니
 감은 눈 속에 금붕어를 가득 채운다

 볕이 좋은 날에는
 그림자도 방향을 굳힌 채

 몇 뼘은 더 가서 기다린다



 <대기실>

 들러리라는 말
 나는 왜 그 말이 외국에서 왔다고 생각했을까

 멀리서 온 줄 알았는데
 여기에 줄곧 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은 세월과 실수에 의해 발견되지

 주인공은 정전기를 일으킨다

 마찰은 주인공의 숙명이란 지문에 따라
 풍선을 머리카락에 갖다 대는 들러리

 실수로 들러리가 풍선을 터뜨리면?
 시선을 가져와도 입장은 드러내지 못할 거야

 주인공이 손에 물을 묻히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란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에 맞출 준비를 하면 어긋났다
 같은 앵글 다른 구도에서도 감정은 연결하고 가자

 행복한 하루 되세요
 하루는 되는 게 아니라 보내는 거지
 형식적인 말들을 비틀면 뭐가 좀 나오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부스스 일어난 머리카락을 보면서
 조용히 극장을 걸어 나왔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공간이 될 것처럼

 가만히 있는 혀의 감각을 익히며
 아 소리를 낸다

 떠오르는 감정에 따라 아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호흡을 다 쓰고 나면 아무 말이나 해 본다

 입안을 벗어나지 않지만 움직이고 있는
 혀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느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섬포도>

 가까운 사람에겐 침묵으로 반항하는 편이에요
 그대로 있는 것에 반응하는 움직임을 믿으니까
 걔네 부모님은 아파트에 색칠하는 일을 한대요
 손수 하는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대요
 궁금하지도 않은 걸 알려 주고
 벽에 시계를 거는 건
 예술과 사형의 기원이라고
 포도 씨가 말했습니다
 많은 것이 한꺼번에 열리면
 한 알 한 알 씹지 말고 삼키라고
 어디에서 다시 열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주광색 형광등을 켜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늘진 구석이 없는 곳에서
 팔의 너비로 시간을 재고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자꾸 박수가 나옵니다
 와인 병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뽑듯이
 깊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에 관해서
 기념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어요
 처음 가 본 동네 어느 길을 돌아
 아파트 동과 동 사이
 그 틈으로 들어온 해를 보고도
 설명하지 못한 낮이 있었습니다
 손바닥이 손바닥을 찾지 않고
 마주 보는 외벽에서
 이어지는 숫자를 발견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있는지
 먼 사람에게 우연히 닿기 위해서
 매일 어떤 자세로 아침을 돌려받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있었다면
 엄지를 갖다 댈 만큼 적당한 포도 껍질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를 땐 층을 세요
 그 길로 곧장 나가면 되는 길을 걸어요
 그때그때 치워야 하는 여름을 생각해요

 

 <겨울 깃>

 날개뼈를 갖고 싶다
 그건 날개와 분명히 다른 방식

 집에 가면 베갯속을 헤집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가리키며 집사람이야
 소개하면 깨는 꿈이었다

 아침에는 욕실 바닥에 치약을 흘리고
 집에 돌아오면 굳어 있겠지 생각했다

 새똥을 맞은 듯 바닥인 채로
 적어도 새에게는 바닥일 수 있다는 것

 행운이 올 거야
 빌어먹을 새는 지금 어디쯤 날고 있는지
 이 근처 나무에 앉아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중 나와 있는 입
 그렇게 단단한 입으로
 허공을 가르거나 바닥을 두드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던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새 사진을 찍는 게 좋았다

 비가 오면
 무엇이든 두드리고 보는 비도
 조금 더 낮은 곳으로 모였다

 어디서 만날래
 물어보면 집에 올 것 같아서
 말없이 빗소리를 들었다
 
 휘슬이 울리는 주전자처럼
 어떤 온도에 반응하고 싶은데
 침을 한 번 삼키는 것으로 이명을 멈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다려서 깬 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회문공작소>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옆 짝꿍이 가위질 한 번에 여러 계단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나는 계단을 헛딛는 상상을 하면서 가위질을 배웠다 지그재그 들쑥날쑥 기러기와 토마토 같은 단어를 생각하면서

 마음 한쪽에 빛이 들어도 다른 한쪽에 그늘이 진다는 사람 앞에서 양면 색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무엇이든 접어 보이는 연습

 검정을 뒤집으면 주황색 같은 살갗과 빨간 피부터 보이는 뒷면도 있었지만 나는 딱지 같은 검정을 매만지면서

 전면이라는 말을 배웠다 그때부터 모든 전면전에는 기억할 만한 어둠이 있음을, 꿈자리에 풀을 바르고 일어서면 따라붙는 간밤의 기억들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쓰다 남은 풀들만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야맹증을 앓았다 전면 승부는 밤에 시작되는데

 낮에 만난 친구들은 계단 옆에 난간이라도 세워 보라 했다 그런 난관쯤이야 나는 기어서라도 오를 거야 생각했으니까

 나는 무언가 세워 올리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계단은 오르는 것 계단은 오르는 것
 
 어느 날 다시 가위를 들고 잠에 들었을 때 문을 열고 지하실 계단에서 구르는 꿈을 꾼다

 온몸을 계단이 두드린 순간, 엄마는 키가 클 거라 했다

 

 <나의 단축어 생성>

 도둑의 까치발, 무용수의 롤르베, 말없이, 말이 필요 없이, 조사 없이, 띄어쓰기 없이, 붙였다가 도로 떼는 연습,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냥 평범한 걸음으로, 걸음의 수를 세면서 대화를 나눠 보세요.

 채소와 과일, 고기, 같은 가격이면 고기를 사지, 그런 선택, 어쩔 수 없음, 열량 계산, 열량의 단위로서, 순수한 욕심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까.

 한도와 약정 중 하나를 반드시 늘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선택의 이유를 서술하시오. (5점)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몇 개, 주인공이 죽지 않는 전쟁 영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검색어가 예상 검색어로 추천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상 검색어는 내 검색어에 대한 다른 사용자나 전범자의 진술이 아닙니다.

 동물, 식물, 자연스럽게, 그런 표현도 참 인간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세상과 타향, 감옥에도, 살이, 두 글자를 붙이면서, 백업하시겠습니까.

 알림 센터. 계절이란 여벌의 옷이 있습니다.

 사복 허용, 음주는 제발 사복을 입고, 귀하의 이름을 제외하고, 다른 말이 적힌 합격 통지서를 받은 친구는 없습니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인생에도, 무상, 두 글자를 붙이면서, 손을 들겠습니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바람 소리가 친구들 귀에 들리지 않게,



 <구석을 내밀면>

 잔술집을 아십니까
 낱잔을 믿으시나요
 떼인 돈
 사람 찾기
 어떠한 규칙도 배열도 없이
 자꾸만 포개지는 기분들

 고통은 기분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묻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묻는 겁니다

 무더기라는 단어를 적어 두신 것 같은데
 간밤에
 흩어지던 꿈속에는 어떤 밤의 밑면이
 별로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은 구석의 감각을 모르거든요
 항상 그게 전부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까
 이번에도
 어쩌지 하는 기분

 구석은 밤과 다른데
 밤의 흉내를 낼 뿐이지만
 그렇게 큰 손으로는 닿을 수 없는데
 그래서 그 사람도 나를 별로

 좋아할 수 없습니다
 축하할 수 없습니다

 대폿집이 줄지어 선 골목
 세탁소 한 곳을 지나치면서
 빠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의 걱정은 이토록 사소하고 꾸준합니다

 같은 냄새를 너무 오래 맡으면
 저렇게 오래 널려 있으면
 어떤 기분을 갖게 될까요

 자욱한 기분을 갖고 싶습니다
 빠지지 않는 고기 냄새
 모두 코를 막고 제 옆을 지나가세요

 먼지와 함께 엉켜 있는 머리카락 아래
 백 원 미만의 동전들
 밀린 청소

 떨어뜨린 건 손의 잘못
 굴러가는 건 모양의 잘못
 다시 찾은 기분보다는 새로 생긴 기분

 축복도 예언의 한 축인데
 이참에 예언가가 되어 보는 건 어떤지
 더 물을 게 없을 때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진분홍색
 벗겨진 살색

 생활감은 구석을 만들고
 구석을 내밀면
 고양이가 한쪽 발을 듭니다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에스키스>

 벨벳 천을 여러 방향으로 쓰다듬는다
 빛이 닿는 족족 얼룩처럼 보이는 무언가

 결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고
 잘 눕는 방향이 아니면
 자꾸 헝클어지는 내가 있다

 어젯밤 잠꼬대 속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같은 자리의 살집만 꼬집는 꿈에서 깨어났을 뿐

 영정 속에서
 말없이 다물었던 입을 떼는 문상객
 그 순간 그의 입술을 보고
 그것만큼 붉은 것을 본 적 있는지 되짚어 봤을 뿐

 급하게 뜬 육개장
 그릇엔 숨이 죽은 파가 걸려 있었고
 숟가락으로 그릇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속으로
 자꾸만 소화시키는 나를 허기라고 믿었다

 불 꺼진 방에서 벨벳 천을 가만히 쓰다듬을 때
 빠져 가는 멍의 가장자리를 닮아 옅게 번져 가는 달빛

 고민을 벗어난 고민은
 이제 어떤 것도 훔쳐보지 못한다



 <그나마 심포니>

 난 말야
 연기가 뻗는 방향,

 희미한 곡선 끝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한 허공까지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며 킁킁거리기 좋아하는
 진짜가 아냐

 재를 뚝뚝 떨어뜨리는 향처럼
 대화가 끊기는 길이를 하나하나 재지 않아

 대신 그 모든 변주가 흐르는 꿈속에서
 오래된 돔과 첨탑의 옆면을 날아다니며 팽이 줄을 감는
 징역을 산다

 몸의 얇은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으레 골목같이 좁은 오늘을 보내다가도

 머리와 목, 손과 팔, 발과 다리
 중요한 것들을 잇고 있다 믿어야 된대

 그렇게 가늘고 유연한 게 정말 나일까

 준비운동할 때 손을 올려 허리를 돌리듯
 어느 방향으로든 기억을 살려 보낸다

 누구도 구원하지 못할 나
 그렇지만 제일 가느다란 나

 아무렇지 않게 긋고 나온 밤의 밑줄을 들어 지휘봉으로 써 줘
 이곳의 바람이 바닥을 간지럽히고 그림자를 웃게 만든다



 <당선 소감>

 도처에 앞이 너무 많습니다
 잘 붙지 않아서, 그러나 그래서, 서로 밀며 나아갈 수 있던 극과 극이었습니다. 나의 방향도 시의 방향도 모른 채 어쨌든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집중하자 마음먹은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시작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게 꽤 오래 자주 부끄럽고 답답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지켜볼 수 없던 가족들. 그들 자신조차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단절의 시간을 향해 그동안 들려주고 보여 줬던 제 말과 표정보다 어쩌면 더 깊은 곳에 손을 뻗어 전하고 싶던 마음이 내내 구석을 채우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러한 시국이 아니더라도 한 명씩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다섯 사람의 시간이 여전히 시만큼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도, 저의 시도 앞으로 조금 더 씩씩하게 나아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저를 정리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제 곁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각자 인생에 어려운 부분과 좋아질 수도 있는 부분을 스스럼없이 나눈 소중한 이들. 친구들과 제 인생의 어른들에게는 미안함 말고 고마움을 말하는 버릇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서 나쁠 것 없는 유익한 조언을 해 주는데 입만 아프게 해서 그건 좀 미안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혼자 알아서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고, 서로가 소중하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양심과 진심의 맥락을 같이한다면 행복할 거예요.
 "요즘은 무슨 일 해?" "요즘도 시 써?" 언젠가부터 자주 듣고 있던 두 질문을 포개어 답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생기다니. 밑바탕부터 차근차근 다져서 유연하게 생각의 뿌리를 내리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이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이곳에 그 누구의 이름도 새기지 않았지만, 쉬이 넘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직접 인사드릴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게 좋아요. 지금까지 시도 그렇게 썼으니까. 그게 익숙해요.
 수습할 수 없는 어떤 일. 기다림이 최선으로 남는 어떤 것. 여지가 없어도 직접 닿아 보고 겪어 보려는 노력이 최근 몇 년간 저를 많이 키웠습니다. 닿을 수 없거나, 닿을수록 꼬이는, 복잡다단한 모든 것은 시 안에서 신중하게 생각할 겁니다. 자책으로 끝내지 않고, 반성이 도약하는 시작을 거듭하겠습니다.
 흔한 이름이라 누군가 뒤에서 반갑게 부를 때도 선뜻 돌아보기 망설여질 때가 많은데 시를 쓸 때만큼은 어디든 앞이라고 여기며 용기 있게 바라보겠습니다. 제 이름을 자주 잊겠습니다. 도처에 앞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든 시와 함께 나아갈 수 있어서 그게 제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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