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과 중이 없는 일만년을 말세라 부른다
우리가 거한 이 공간은 행과 중 없이
수백만년의 시간이 흘러 사라져간 곳이다
2
그는 오로지 사두들만이
이적으로써 고독해질 수 있는 자라 생각했다
어둠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그는 신이 한 개의 몽정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3
나의 꿈에 당신이 몇 명이나 당신을 등장시켰는지
당신의 꿈은 알 것이다
길잡이 하인과 잡인 사이에서
새로운 벽사문이 태어났다
당신이 우리의 이름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 부르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같은 곳으로 사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난 계절 발랐던 도료들이 흰 작약처럼
죽은 자기 머리에 머리를 기댄다
포르말린 냄새로 누나들을 설레게 한 병동의 일박 이일
달의 분화구에 타인의 체온을 넣어두는 일박 이일
나의 첫번째 사람인, 전서체로 만들어진,
내 또래의,
서사시의 괴수들과만 놀았다
소동의 약속은 한 가지 식물을 한 가지 잎으로만 속이는 일
혼잣말과는 처음이니까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를 몰랐고
나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곡물이 되었다
전생에 자기의 씨앗을 먹고 죽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애는 울지 않는다
미안해해야 할 일을 찾고 있는 것처럼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 배웅을 해주었다
참기 위해 날아야 했다, 예를 들면
전혀 괜찮지 않은 여름
소문이 되고 싶었다
[여기서부턴 해가 지지 않아!
직소퍼즐 같은 달이 똑바로도 거꾸로도 빛나!]
소문이 나의 말투에 또 심한 짓을 하고 있다
4
속죄일에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상자 안에 형제들을 넣어라,
그들을 태울 불과 함께
이해는 너희에게 백년 만의 희년이니
끈 없는 그네를 타자 그날부터 아무것도 내 배꼽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약지에서 반지를 빼앗던
너무나 외로웠던 무희들의 낮잠
끈 없는 그네를 타자 너희는 작아지는 체조를 한다 앞의 뒷면을 향해
'이 이상 당신보다 희미할 순 없어요' 가시 같은 태몽을 입안에서 골라내고 있었다
분무기 곁의 무지개는 한동안 쓸쓸히 마른다
악처들이 우리집에 오기 전에 작년처럼 작년과 똑같이
저 적적한 빛에게 맞잡을 것들이 필요한데
다음 사람과 다음 사람 사이엔 늘 손의 하찮음이 태어나고 있었다
야행하는 두 다리는 물론 내 고백의 추정 나이에 불과했다
단 한번도 고백에서 생략된 적이 없는 세계 역시
쓸쓸한 말을 사람 아래서 뒤적이고 있었다
줄 사람이 없어 쓰레기통에게 심장을 줬다
혼자 듣기에는 아까우리만치 혼잣말은 유창했다
5
이름을 적은 모래밭엔 그 이름을 지우는 바람이 분다
영원히 읽을 수 없는 것이 마치 그의 이름이라는 듯
비문경은 하루에도 몇번씩 자기의 발견을 슬퍼한다
겨울 근처 너무 많은 결빙과 약속하는 건
모두에게 온 편지가 빈 물통 수준이기 때문이다
종달새 부리를 붙잡을 정도로 나는 추웠다
이제 아득한 숲은 풍력발전소 날개를 따라
미확인물체로의 첫 상승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면서 자기 칫솔을 꼭 쥐고
새는 친절하지 않게 내 입안 구석구석을 날아다녔다
응급실에서 작은 호스를 콧구멍에 끼우고 나누던
막말처럼 들리던 당신의 존댓말은
매달린 링거액보다 낮기 때문에 역류하지 않는다
한 치수 큰 옷의 일박 이일
간호사의 볼기짝 때리기를 애호하던 일박 이일
사랑하고픈 것보다 사랑받고픈 것들로 둘러싸였다는 걸 알게 될 때쯤이면
길쭉한 대낮으로 너희들의 자장가를 쑤시고 싶었지
손가락은 길고 하얗지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열매는 길고 붉지
첫 성찬식은 네가 발 담갔던 더러운 물이 내 얼굴에 부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직 정을 모르는 식물에겐 이런 글을 써줬어:
체혈 그리고 맛없는 식사
6
움직임에 비록 글은 없지만 형상을 떠돌지 않는 말이 있어
이것을 주라 부른다
끊어진 족속은 흉을 갖지 아니하니
본디 말은 나에게 있지 아니하다
주의 남방은 다하지 못한 것을 부르는 가지의 이름이고
주의 북방은 줄기에 자라는 좇음의 이름이니,
사람은 이로써 한창과 쇠함을 알고
첫번째 머리를 잃는 것이다
인간이 생겨나는 놀이를 너와 한다
낱말은 그만큼 가죽이 얇아진다
그만큼 포옹이 백지장 같아진다
어두운 방은 맹독의 무게를 재면서
발작까지의 기나긴 깨끗함을 시작하고 있었다
몸 위의 반점들이 나에게 훌륭한 알을 쥐게 한다
나는 눈과 결혼하고 동굴과 파혼하고
그리운 역을 지나친 다음엔 언제나 '찢어지고 싶어요'
손톱 발톱에게 찬란한 글을 써주고 진물을 쥔다
하지만 당신에겐 태엽 풀리는 작은 소리가 대체로 위생적이다
처녀의 머리색으로 나의 하체를 아름답게 염색하는 날
생사관에 대한 일박 이일 동안의 변심
버려졌던 순간을 잊고 또다시 흙 위로 비굴한 손을 내미는
그런 씨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우리를 둥지 근처로 이끄는 건 아주 작은 것들뿐, 예를 들면
몇개의 글씨 때문에 우리는 놀랍게 축소될 수 있다,
추잡한 행동 이후의 우리는 꼭 자장가를 부른다, 따위
허물벗기를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좀더 근사적으로 우리는 '서로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놓은 아이의 손은 야윌 대로 야위어서
캄브리아기로, 실루리아기로 차곡차곡 옥상에 쌓이고 있었다
척추가 없던 황홀한 지질시대의 일박 이일
나의 무성생식은 마술왕 후디니와 그의 생매장 묘기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7
이서는 속씨식물과 사람으로 나뉘고 있었다
서쪽 방의 술은 아름답고
받은 글자들은 불살라진 채 편지 안에 들어 있었다
나를 낳아준 여성처럼 삼기에
나는 이러한 표착을 너무 많이 애도했다
나와, 감은 눈과, 다시는 감을 수 없는 눈
그렇게 셋은 깊고 따뜻했던 잘 마른 서쪽을 생각했다
그들의 달라붙은 등도 이때만큼은 하나인 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나의 스무살은 열아홉살 식 점액질이기도 했다
질릴 때까지 풀들은 자기의 시든 머리가 유용하지 않다는 것만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확대가족의 일기를 쓴다
우린 혼절했고 고백은 어마어마하게 작아져서
약간의 생각도 집어넣기 어려워 보였다
그렇게 남겨진 귀류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두 눈의 불화
운동장 가득 메운 남학생 여학생들의 더러운 춤에
사회복지사는 셋! 셋! 하고 박자를 쳤다
양말곽 안엔 모든 것이 발이 될 수 있는 신비로운 힘들이 들어 있었다
착한 바지를 하나둘 벗길 때의 비참함을 느껴본 이들에게
어두운 창을 뒷주머니에 구겨넣고 걷는 오후에게
새로운 가족은 낡은 가족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손을 맞잡고 있었다
풀칠의 순서가 바뀌는 것만으론 편지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다
다정한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제멋대로 상처입을 것이다
상처입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모두 제멋대로 다정한 말을 할 것이다
비위생적인 주방에서 만난 우생의 모든 맛
외로운 자세의 접시들 앞에서
심야 드라마는 병실의 주인공을 향해 설렘 없는 한숨을 쉬었다
8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기를 응시하지 않는 신과 만났다
이 허무 때문에 그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9
나는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곳의 절망은 자신의 운을 보려는 자의 운보다 가벼웠다
-소경
목동이 길을 잃자 떨리는 심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달린 바람이 태어났다
뭐가 섞여 오는지도 모르면서 신이 인간을 거기서 데려온다
신의 기술은 인간의 음미뿐
은총을 입은 자는 버려질 자의 다른 이름이니
이 사람은 돌아갈 곳에 대한 한 사람이니
지금 그의 낮은 혼일을 너로부터 돌려받는 값은 없다
언제까지라도 풀들은 계절 끝이 우연이라고 한다
버려지는 것이 슬퍼서 언덕에서 언덕으로 길고 서러운 소리를 끌며 건넌다
이미 건넌 강으로 가자
그 속에 익사해버려라
밤이 만드는 어둠의 질서를 외울 수 없었던 신은
인간의 눈을 통해 자기의 절망을 얼마만큼 빌려줬는지를 기억한다
뼈가 내리는 날
물결은 짧고 고백으로 긴 고백을 지우고 있었다
강은 강의 어머니가 되리니
이 사람은 바닥없는 운명으로 여자 중에 태어날 것이다
이것은 목소리이지만 스스로 만들어졌기에 부끄러움을 안다
그자는 그자 눈의 첫 피조물이니
네가 세 번이나 고기를 잡으러 가서 단 하나의 바다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이
이 슬픔은 모양을 가져오지 않는구나
노 젓기의 실수는 물결의 탄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후음을 따라
차례로 병이 지켜진다 어금니가 흔들린다
미닫이창을 닫아다오, 잊혀짐이 오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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