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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 환상의 빛

 

창비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시집 (창비시선 303), 단품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Lo-fi(로파이):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 강성은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양장 ]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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