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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