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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 가방 이야기

 

창비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시집 (창비시선 303), 단품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Lo-fi(로파이):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 강성은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양장 ]

 

 

 이것은 가방에 관한 이야기 철없던 오빠가 돈과 옷과 장난감을 가득 채워 집을 나갔던 커다란 가방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돌아온 오빠를 아버지와 어머니는 흠씬 두들겨팼지만 가방은 수척해진 모습으로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지퍼를 열자 가방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가방은 마루에서 다락으로 다락에서 창고로 옮겨졌고 어느새 오빠는 쾌활함을 되찾았다 다시 창고에서 가방을 꺼내온 건 아버지였다 냄새나는 지폐 뭉치들을 신문지로 싸서 가방에 담은 아버지는 어두운 새벽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일주일 후 강물 위로 떠올랐지만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따뜻함을 떠올리려 애썼고 가방 따윈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비린내가 나는 어머니의 양쪽 가슴을 나누어 만지며 밤마다 오빠와 나는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다 어느날 가방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들고 온 가방을 보고 우리는 소리쳤다 오빠가 들고 나갔던 가방이야 아빠가 들고 나갔던 가방이야 그 가방이야 엄마는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엄마는 분명 저 가방을 들고 우릴 떠날 거야 우리는 한밤중에 살금살금 일어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가방 속은 넓고 어두웠지만 온 집 안을 삼켰던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아침이 오자 엄마는 울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가방을 열지 않았다 우리를 가방 속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엄마는 우리를 찾느라 돌아오지 않았다 가방 속에서 우리는 자라났다 이야기를 먹고 자라났다 가방이 들려주는, 가방 속에 가득 차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았다 잊혀진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도 있었다 누군가 지퍼를 열어준다면 이 밤이 끝날 텐데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맞잡은 두 손은 언제부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 지퍼를 열었다 엄마였다 우리는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는 노망난 늙은이들이라며 경찰서에 신고전화를 했다 우리와 함께 집에서 쫓겨난 것은 가방이었다 우리는 눈 내리는 밤 골목에서 가방과 함께 서 있었다 눈에 보이지만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차가운 눈이 조금씩 우리 위로 쌓였다 우리는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기가 가방 속이라니 이렇게 따뜻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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