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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 - 囊

 

아무는 밤:김안 시집, 민음사 오빠생각(일반판):김안 시집, 문학동네

 

 

 아침입니다. 책상 아래입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출근하고, 아기들은 울기 시작합니다. 당신이라는 쓰기의 등을 열어젖히고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립니다. 책상 아래입니다. 어둠의 속살은 무슨 빛깔일까요? 햇빛은 사람들을 달려가게 만듭니다. 어둠은 그 속살을 숨기기 위해 긴긴 동굴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신이 탄 지하철은 이름 없는 동굴의 미로 속에서도 용케 길을 찾아 당신을 배달할 테지요. 하지만 이 안에 당신이라는 쓰기가 끝끝내 말하고자 했던 서정과 미래 따위는 없군요. 그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책상 아래입니다. 아침입니다. 마야콥스키의 권총이나 예세닌의 마지막 잉크를 생각하면서 난 자위나 줄여야겠습니다. 새로운 각오 속에서 당신과 당신의 마음의 노역과 곤욕스러운 이 가정을 버티고 있는 모국의 국기 색깔을 떠올립니다. 나의 국적은 어디입니까? 책상 아래입니다. 당신이라는 쓰기의 등을 열어젖히고 들어갑니다. 당신과 내가 세웠던 육신의 유적지들을 배회합니다. 하지만 아침마다 새파란 눈을 깜박이며 모르몬교도들이 자꾸만 찾아와 피안을 이데아를 영겁을 말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책상에 앉아도 이 아침은 끝나질 않습니다. 아기들은 울기만 합니다. 지구 따위는 멸망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자궁을 기억하기 위해 웅크립니다. 나에게 더 가까워질수록 아침입니다. 책상 아래입니다. 어둠이 뚫어놓은 이 동굴은 나를 어디로 배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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