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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 밤의 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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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돕는다.

 밤사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고

 쏟아지는 밤

 흘러가는 밤

 폐를 뚫고 나오는 밤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심부름을 떨어뜨렸다.

 상가의 입구에 외부인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다그치고 있었다. 말해봐 말해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해봐

 

 이 관계를 끝장낼 거야

 

 밤을 돕는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떠도는 밤

 헬쑥한 밤

 다가갈 수 없는 밤

 시체 위에 누운 시체들

 박자를 맞추어

 가슴이 찢어졌다.

 

 상치, 쑥갓, 깻잎, 미나리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파란 것들이 파랗게 꼼짝 못하는 것들이 쓰러져 있었다. 바구니 하나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조형적인 밤 조형적인 모퉁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불빛들

 짓다 만 건물들 지어지지 않는

 

 건물들에서 울려 퍼지는 말해봐 말해봐 말해봐

 

 쓸데없이 말해봐

 돌이킬 수 없는 밤

 

 밤은 모든 것을 밤으로 몰아넣고 있다.

 밤은 밤으로 돌아가고

 밤은 아직도 밤과 함께 가득 차 있다.

 

 밤을 헤집으며 붉은 노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노끈에 묶인 보따리들이 검은 비닐봉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끝이 갈라지고 풀어지며 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밤 위에 눕지 못하고

 

 아무도 밤 위에 눕지 못한다.

 형체를 지니지 않는 밤

 형체 없이 열려 있는

 

 밤을 돕는다.

 손을 내밀지만

 붙잡을 수 없는 밤

 오지 않고

 

 중단되는 밤

 

 어디선가 너무 작은 도마뱀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밤새

 

 밤을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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