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계영 - 왼손잡이의 노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유계영 시집, 문학동네 온갖 것들의 낮:유계영 시집, 민음사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유계영 시집, 현대문학

 

 

 귀신에게

 나고 자란 골목이란 삐뚤어진 어깨선

 양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

 우리는 우측으로 들어왔습니다만

 우측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만

 좌측이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꼼꼼히 풀칠한 편지봉투를 찢듯 한밤중에는,

 

 골목의 모서리를 찢어발기며 즐거웠다

 몇 번 죽어본 자들도 제 머리를 바닥에 내던지며

 튀기고 놀았다

 어린 귀신들은 골목의 양팔에 매달려 소원을 빌었다

 나를 무겁게 나를 살찌우게

 더이상 사라지지 않게

 (......)

 

 *

 

 밤새도록 빌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졸고 있는 어린 귀신의 머리를 내 어깨에 뉘였다

 그러자 어린 귀신이 매섭게 쏘아보고는

 모두 잠든 밤에는 울지 말기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으니

 

 *

 

 날이 밝자마자 늙은 여자가 흰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나와

 화단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꽃은 제라늄...... 이 꽃은 제라늄......

 

 주정뱅이들이 쑤셔박은 담배꽁초들을 그대로 두고

 머리카락이 더욱 희어진 채로

 골목의 바깥으로 사라져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한참 동안 울리다가

 뚝 끊기는 순간

 

 *

 

 이상한 일이다

 죽은 이에게 산 자의 취향대로 고른 티셔츠와

 스웨터와 점퍼와 코트를 입혀두는 것은

 이  많은 빨랫감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저승이 이승보다 춥다는 오류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계영 - 개와 나의 위생적인 동거  (0) 2021.01.13
유계영 - 동창생  (0) 2021.01.13
유계영 - 심야산책  (0) 2021.01.13
유계영 - 눈금자를 0으로 맞추기 위해  (0) 2021.01.12
유계영 - 더 지퍼 이즈 브로큰  (0) 202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