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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가능한 통조림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 안희연 시집, 창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시집, 창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시집, 현대문학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서랍의날씨

 

 

 묻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요 나는 홀로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목록을 작성합니다 축 늘어진 고양이를 안고 와서 불이 꺼졌다고 말하는 것 나는 대답 대신 검은 고양이라 적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는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오후에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통조림을 하나둘 꺼내봐요 뚜껑을 열면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들, 나는 팔꿈치와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내 몸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통조림을 상상하죠 아름다운 불 속에서 아주 잠깐 낮잠을 자는 거예요 얼굴이 다 녹아내릴 때까지

 

 어깨를 두드리기에 돌아보면 새하얀 커튼이 흔들리고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에도 잠들이 가득합니다 머리끝까지 지퍼를 올려 닫은 나무들 그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 화단에선 꽃들의 목이 뚝뚝 잘려나가지만 이제는 벽돌 위에 벽돌을 얹듯이 창밖을 바라볼 수 있어요 새들은 새장 속에 있을 때 가장 멀리까지 날아가고

 

 나는 천장까지 쌓인 통조림을 보면서 이리저리 몸을 접는 연습을 합니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의 자세를 상상하면서 영원한 잠에 빠진 오필리아가 되어 이곳에서 걸어 나갈 아침을 기다려요 그러나 오늘은 몸 밖으로 뼈를 꺼내 입은 일요일 묻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성벽처럼 줄지어 서있고 나는 보이지도 않는 의자에 꼼짝없이 묶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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