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참호에서
고개를 젖히고 비를 마셨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무전도 없고
구호도 없고
전투도 없고
긴 전쟁이었다.
전쟁이 꼭
전생 같아
비가 내리는 날에는
두 팔을 잃은 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다.
모르핀을 놓아 준다.
다리를 잃은 자는 두 팔로 걷고 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머리를 잃은 자는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걷다가
팔을 휘저으며 서 있었다.
쟤 때문에 우린 다 죽을 거야
무전기를 든 자가 말했다.
비가 그치면 무전이 오겠지
구호품을 든 자가 말했다.
남은 건 모르핀밖에 없어
두 팔을 잃은 자가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네
다리를 잃은 자가 말했다.
죽어도 살아서 돌아갈 거야
나는 빗물을 마시다 말고 말했다.
어디로
머리를 잃은 자가 손가락을 들어 두 시 방향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