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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 모르핀

 

[민음사] 작가의 탄생 유진목 시집 [민음의 시 275 양장 ] 연애의 책, 삼인 식물원, 아침달 시인 목소리, 북노마드 산책과 연애, 시간의흐름

 

 

 비가 내리는 참호에서

 고개를 젖히고 비를 마셨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무전도 없고

 구호도 없고

 전투도 없고

 

 긴 전쟁이었다.

 

 전쟁이 꼭

 전생 같아

 

 비가 내리는 날에는

 

 두 팔을 잃은 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다.

 

 모르핀을 놓아 준다.

 

 다리를 잃은 자는 두 팔로 걷고 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머리를 잃은 자는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걷다가

 

 팔을 휘저으며 서 있었다.

 

 쟤 때문에 우린 다 죽을 거야

 

 무전기를 든 자가 말했다.

 

 비가 그치면 무전이 오겠지

 

 구호품을 든 자가 말했다.

 

 남은 건 모르핀밖에 없어

 

 두 팔을 잃은 자가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네

 

 다리를 잃은 자가 말했다.

 

 죽어도 살아서 돌아갈 거야

 

 나는 빗물을 마시다 말고 말했다.

 

 어디로

 

 머리를 잃은 자가 손가락을 들어 두 시 방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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