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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 할린

 

[민음사] 작가의 탄생 유진목 시집 [민음의 시 275 양장 ] 연애의 책, 삼인 식물원, 아침달 시인 목소리, 북노마드 산책과 연애, 시간의흐름

 

 

 하루는 보다 못한 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할린에게 물어보라 했다.

 

 할린은 죽은 자이지만

 묻는 것에 대답하는 자이며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지만

 믿기도 하여서

 

 할린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나는 내가 죽는 날을 알고 싶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날을 향해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아마도?

 

 나는 어떻게 죽는지 그 또한 알고 싶었다.

 

 그런 게 왜 알고 싶어?

 

 넌 알고 싶지 않아?

 난 알고 싶지 않아

 

 네가 알게 된 것을

 내게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언제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모르고 싶어?

 모르고 싶어

 

 너는 알고 싶은 게 없어?

 나는 알고 싶은 게 없어

 

 아는 것도 전부 잊었으면 좋겠어

 

 나도?

 가끔은 너도

 

 언젠가 그도 할린을 찾은 적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할린을 찾으면

 할린이 올 것이라 했고

 

 세상 일이 그러하듯이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라고 

 

 나는 전과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할린을 찾았을 때

 할린이 알려 준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혼자서 죽을 것이며

 죽고 난 뒤에는 죽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죽고 난 뒤에 나는 죽은 것을 알고 싶었다.

 

 할린이 물었다. 죽은 것을 알아서 무얼 하려고?

 

 내가 죽은 것을 말하자면 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할린이 말했다. 자비는 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자비는 무엇인가요?

 

 네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후로 할린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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