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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시집, 문학동네 [달]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마스크제공), 단품 신춘문예 당선시집(2018), 문학세계사

 

 

 

 첫 장면을 들추면 보인다

 나는 알면서도 그랬다

 

 섬에서 살겠다고 집도 다 구했다고

 떠들던 날의 첫 장면

 나는 그 장면을 후회할 수 없다

 

 모든 첫 장면은 양초와 같으니까

 미워하기 전에 사라지니까

 평생 입 열지 않으니까

 

 낮이란 낮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낮에는 자꾸 다짐하게 되니까

 새 마음 먹게 되니까

 내가 잘 보이니까

 

 자주 무섭다가

 그 상태 그대로 매번 웃는다

 

 섬에 살다보니

 섬과 처지가 같아진 것이다

 혼자 한가해서 매번 혼자 회복하는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동경이 꾀기 때문이다

 

 이리 와서 물결을 보라

 물결이 어떤 존재를

 쫓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라

 

 존재가 있을 만한 자리에

 아무 존재도 없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