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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시집, 문학동네 [달]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마스크제공), 단품 신춘문예 당선시집(2018), 문학세계사

 

 

 이미 하얀 집에 눈까지 내리는 건

 어떤 소용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금방 사라졌다고 며칠 만에 다시 눈이 내려요

 이번에는 오래 흘리다 가줄까요?

 

 눈이 쌓이는 만큼 빛은 자기를 최대한 펼쳐놓아요

 펼쳐서 얻는 게 별로 없을 텐데도

 사람 좋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닥에 널어놓아요

 저렇게 물도 들지 못하고 웃으며 사는 것 좀 보세요

 

 눈은 그렇듯 쌓이고 모여서

 골목까지 아낌없이 생기를 펼쳐놓아요

 

 불편하면 고개를 저어도 될 텐데

 절대 그러지 않아요

 사랑받고 싶은 것이겠지요

 

 눈이 저러는 동안

 바다는 꾸준히 여전히

 줄었다 늘었다 반복해요

 사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겠지요

 

 눈 쌓인 섬도

 살결이 푸른 바다도

 전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보면 좋을 일들이 전부

 사느라

 아무 소용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