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발가락은 오래된 건반, 거기서 떨어진 봄의 기억은 모두 음악이 되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계속 걷는 발이 불쌍해, 발톱이 튕겨내는 겨울을 창백한 소리로 노래하며 걷고 또 걸었다
내 입술은 당신의 언 발가락을 녹일 수가 없어, 햇빛을 날카롭게 갈아 굳은살을 베어내도 차가운 음계는 발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음악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자, 발가락이 유리잔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아
폭설은 이미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우리를 감쌌고 얼음의 숨소리가 귓가에 파란 브로치를 달았다 발톱에서 솟아오른 달이 하얗게 변할수록 길은 불협화음으로 부서져갔다 유리 바다를 걸어도 얼어붙은 발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에서 불어왔다 한 계절보다 긴 음악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다 더는 걸을 수 없어, 언 몸을 녹이려고 끌어안았을 뿐인데, 당신은 맑은 파열음을 내며 수천 조각으로 깨졌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철 - 비의 미장센 (0) | 2020.12.04 |
---|---|
이병철 - 시계 속의 안개 (0) | 2020.12.04 |
이병철 -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 (0) | 2020.12.04 |
이병철 - 흩어지고 돌아온 것이 고작 (0) | 2020.12.03 |
이병철 - 아파서 빛나는 것들 (0) | 202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