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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

 

문학수첩)오늘의 냄새 : 이병철 시집 (시인수첩 시인선 10) [새미]원룸속의 시인들 - 새미비평신서 22, 새미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이병철 산문집, 산지니 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북레시피

 

 

 네가 사는 마을에는 은빛 비가 내릴 것 같아

 수련 위에서 빗방울은 찬 빛을 뿜겠지

 햇살이 젖은 꽃잎을 말리는 동안

 물방울은 붕붕거리는 데이지 향이 되어

 네 반지에 내려앉을 거야

 

 물소리가 일어나는 네 자궁 속에는

 손끝에 별빛을 틔운 아기가 웅크리고 있겠지

 백합과 하이신스 그리고 티아라

 그 꽃말들을 아직 기억하는지

 네 입술이 뱉는 자음 모서리에 나비가 날아들고

 들뜬 아기는 자꾸만 발을 구를 거야

 

 가로등이 이끄는 수레에 저녁이 담기고

 감자 수프 냄새로 내려앉는 밤하늘,

 너는 서툰 이국 말로 상인들과 흥정하며

 별을 담듯, 쾌활하게 장바구니를 채우겠지

 

 네 입술이 엎지른 적포도주가 되어

 바게트 빵 같은 어깨로 스며들면

 저 먼 대륙에서는 소년병들이 쓰러지고

 벵골호랑이는 질긴 살가죽을 찢으며

 피비린내를 음미할 거야

 잠깐이라도 소년병들과 벵골호랑이를 생각해 줘

 그러면 내 더벅머리도 떠오를 테니

 

 내가 비 개인 붉은 저녁을 바라볼 때, 너는

 오전의 싱그러움 속에서 빨래를 널고 있겠지

 저 노을은 네 침실의 할로겐 불빛일 것만 같아

 긴 손톱으로 할퀴어 놓은 흉터가 따끔거려

 까마귀가 날아와 내 살을 쪼아 먹기까지

 달빛에 몸을 말리며 여기 서 있고 싶어

 젖은 몸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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