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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장마 냄새

 

문학수첩)오늘의 냄새 : 이병철 시집 (시인수첩 시인선 10) [새미]원룸속의 시인들 - 새미비평신서 22, 새미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이병철 산문집, 산지니 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북레시피

 

 

 비가 입술 위에 쏟아지고 입술의 빨강과 비의 무채색이 더듬더듬 끊어지는 네 말에 쏟아지고

 

 우산을 펴겠지 구름이 없는 하늘을, 젖지 않는 머리카락을, 촛불 백 개를 켠 고해소를, 힘없는 무릎을 우산 속으로 데려올 거야 우산 속 어제로 우산 바깥의 내일을 밀어내는 가시 돋친 식물

 

 흙물 흐르는 골목에 엎드리면 네가 사는 지붕까지 기어갈 수 있어 빗속에 숨은 발꿈치를 들을 수 있어 네 몸의 장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소리에서 냄새로, 냄새에서 예감으로, 예감에서 육체로 부글거리는, 오래 참은 말들이 이룬 한낮의 폭우

 

 식물은 빗속에서 동물이 된다 눈으로, 귀로, 셔츠와 속옷으로 흘러드는 비를 마시며,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움직이는 뿌리의 수평, 꽃을 잃고 색을 잃은 진딧물들이 소름 돋는데, 몸을 둥글게 꺾으면 뱀과 넝쿨 중 어느 쪽이 더 슬플까

 

 둥근 등뼈와 어깨의 비대칭, 작고 예쁜 젖가슴...... 우리가 뒤엉켰다가 풀어진 자리에 곡선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비가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얇은 살갗 하나 뚫지 못하면서 너는, 식물의 심장까지 어떻게 바늘을 밀어 넣은 거니

 

 비가 아파서 우산을 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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