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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묵상

 

문학수첩)오늘의 냄새 : 이병철 시집 (시인수첩 시인선 10) [새미]원룸속의 시인들 - 새미비평신서 22, 새미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이병철 산문집, 산지니 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북레시피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아 말씀을 읽고 있었다 뙤약볕이 운동장을 반만 엿보는 대낮이었다 공을 쫓아 달리는 아이들이 촛불처럼 너울댔고명암의 경계에 선 골키퍼는 몸 잘린 시체 같았다 빛과 어둠을 오가던 먼지가 말씀 위로 내려앉았다 십자가 모양으로 벌어진 화단 블록에서 검은 히브리어들이 기어 나왔다

 

 화단은 생육하여 번성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장미꽃과 꿀벌 사이에는 어떤 말씀이 있어 손톱만 한 허공이 투명한 불로 이글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화단에 앉아 있으면 성기가 자꾸 단단해졌다 매미에게는 매미의 말씀이, 축구공에는 축구공의 말씀이, 내겐 성기의 말씀이 있기에 태양이 어디 내려앉아 반짝이든 상관없었다

 

 무서운 계명처럼 축구공이 굴러왔다 아이들의 눈빛이 내 운동화에 녹슨 못을 박아댔다 그늘에서부터 튕겨져나온 몸이 구겨지고, 목 뒤로 흐르는 땀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헛발질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다

 

 아이들의 얼굴이 동전처럼 쏟아졌다

 발로 차야 하는 공을 손으로 굴렸다

 

 그늘 속에서는 꽃도 매미도 그늘의 일부였다 더럽힌 손에 침을 발라 말씀을 넘김수록 그늘이 운동장으로 엎질러졌다 아이들의 무릎에서 시간이 부서졌다 공은 다시 굴러오지 않았지만 성기는 계속 단단했다 검은 히브리어들이 교복 바지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성기를 물어뜯어도, 말씀이니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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