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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 어느 갈비뼈 식물의 보고서

 

[문학과지성사]거인 -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7, 문학과지성사 모두가 움직인다: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한 문장: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소설을 쓰자, 민음사

 

 

 빗방울과 화석이 만나서 돌이 얼었다가 깨지기를 몇 번 거듭한 뒤 싹을 틔우는 식물이 있다. 이런 식물은 대개 씨앗일 때부터 갈비뼈를 지니는데 현미경의 깨알 같은 눈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그 식물의 내장은 얼었던 싹을 틔우면서 서서히 그리고 미세하게 박동을 시작한다.

 

 맨 먼저 반응하는 것은 물론 심장이다. 시약을 떨어뜨리면 싹이 나오면서 생긴 급작스러운 균열과는 달리 천천히 그러나 거칠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한 식물의 갈비뼈를 만날 수 있다. 너무 가까워서 곧 만져질 것도 같은 그 숨소리는 실은 심장 인근에서 작동하는 호흡기가 틀어놓은 박자를 따른다. 육안으로는 심장의 박동이 더 선명하다.

 

 관찰과 사육을 반복하는 생물학자들 중 일부가 이 식물의 씨앗의 단면을 얻는 데 성공했다. 흔히 식물의 군락지라고 할 수 있는 동네 야산의 절개지에서 볼 수 있는 단면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이 식물은 보여준다. 빗물은 물론 공기도 침투할 수 없는 씨앗의 표피는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외부의 침입(가령, 날카로운 칼날)에 대하여 쪼개지기보다는 안으로 뭉개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항복보다는 자결을,

 

 순결보다는 그러나 인내를 이 식물은 더 선호한다. 죽음을 예감하면 씨앗부터 내버리는 것이 식물마다 공통된 오래고 더딘 진화의 결과이지만 씨를 뿌린 이후의 양상은 조금씩 매우 다르다. 틈만 나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미는 것이 있는가 하면 드물게는 이 식물처럼 바위틈이나 돌 틈으로 아니면 화석의 형태로 잠입을 시도하는 것들도 있다. 인간의 음식으로 부적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 년을 기다려서 겨우 열매를 맺는 식물, 이 식물의 갈비뼈를 자근자근 씹는 것이 가까운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최근의 한 연구를 읽은 적이 있다.

 

 틈만 나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씨를 뿌리기 전부터 인간의 습성이기도 하다. 모판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볍씨들의 치열한 몸짓이 몇만 년에 걸쳐 사람의 입맛을 닮아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속도가 붙고 개량을 서두르는 와중에도 어떤 식물은 잠만 자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느긋함을 촉진하는 이 식물의 갈비뼈 성분이 밝혀지는 날, 우리들 식탁에는 또 어떤 인간의 이름이 올라올지 모를 일이다. 건강식품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잡초의 이름과 함께 또 인간의 이름이다. 가령, 이 보고서도 그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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