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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트라클 - 시편

 

몽상과 착란, ITTA 꿈속의 제바스치안:게오르크 트라클 시선집, 울력 푸른 순간 검은 예감, 민음사 색의 제국:트라클 시의 색채미학, 서강대학교출판부

 

 

 빛이 있다, 바람이 불어 꺼트린 빛이.

 주정뱅이가 낮에 버리고 간 들판의 술잔이 있다.

 불에 타버린, 구멍마다 거미 떼가 가득한 포도밭이 있다.

 방이 있다, 그들이 우유로 회칠해 놓은 방이.

 미치광이는 죽어버렸다. 남쪽 바다에 섬 하나가 있으니,

 태양신을 영접하기 위한 섬. 그들이 북을 만진다.

 남자들은 전쟁의 춤사위를 추고

 여자들은 덩굴줄기와 불의 꽃들로 뒤덮인 허리를 흔드니,

 바다가 노래할 때에. 오 우리들의 잃어버린 낙원이여.

 

 요정들은 금빛 숲들을 떠나갔다.

 그들이 이방인을 땅에 묻는다. 그러고는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판의 아들은 광부의 모습으로 화하여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의 정오를 잠으로 보낸다.

 뜰 안의 어린 소녀들이 입은 곳가지에는 가슴 찢어지는 가난이 가득하다!

 방들이 있다, 화음과 소나타로 가득한 방들이.

 눈먼 거울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는 그림자들이 있다.

 병원 창문에서 볕을 쬐는, 회복하는 자들이.

 피투성이 역병들을 담은 하얀 증기선이 운하를 오르고 있다.

 

 낯선 누이는 또다시 누군가의 나쁜 꿈들에 나타난다.

 개암나무 덤불에 머무르며 누이는 그의 볕들을 가지고 논다.

 학생 하나가, 어쩌면 그의 도플갱어가, 창문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좇는다.

 그의 뒤에는 죽은 형제가 서 있다, 아니면 그는 낡은 나선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갈색 너도밤나무의 어둠 속에서, 젊은 신부의 형체가 하얗게 질린다.

 정원은 저녁의 안에 있다. 서로 엇갈리며 퍼덕이는 박쥐 떼.

 집사의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하늘의 금을 찾아 헤맨다.

 사중주의 마지막 화음. 눈먼 소녀가 몸을 떨면서 대로 위를 내닫고,

 얼마 후 그녀의 그림자는 차디찬 벽들을 더듬으며 갈 것이다, 우화들과, 신성한 전설들에 둘러싸인 채.

 

 텅 빈 나룻배가 있어, 저녁의 검은 운하를 떠내려간다.

 오래된 수용소의 음침함 속에서 인간의 폐허들이 몰락하고 있다.

 죽은 고아들이 정원 담벼락 위에 널려 있다.

 회색의 방들로부터 걸어 나오는 천사들, 그 오물투성이 날개들.

 누렇게 변한 그들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벌레들.

 교회 앞의 광장은 어둡고 묵묵하다, 유년의 날들에 그랬듯이.

 은빛의 발을 단 전생들이 스치듯 흘러가고

 저주받은 자의 그림자들은 신음하는 수면 위로 내려앉는다.

 그의 무덤 속에서, 백색의 마술사는 뱀들을 데리고 논다.

 

 해골산 위로 조용히 열리는 신의 금빛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