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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나무 공에 의지하여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피로를 모르는 마음이 나무 공을 굴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종이 위를 구르는 돌멩이 곁을 피로를 모르는 나무 공이 스쳐 지나간다. 나무 공은 둥글고 나무 공은 병들고 나무 공은 돌아갈 수 없다. 나무 공은 나무로부터 온 작은 방울입니까. 나무 공은 방울에 속하지 않습니다. 나무 공은 지나간 계절로부터 도망 나온 지나간 열매입니까. 나무 공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나무 공에 의지하여 쓰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있다. 바닥에서는 보이지 않는 빛이 떠오르고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떠다니고 있다. 이곳에 너와 나 말고 다른 무엇이 있는가.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무엇이 있습니다. 종이 위에 나무 공. 나무 공 위에 돌멩이. 나무 공에 의지하여 듣고 있다. 듣기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붉은 새의 울음을 다시 기다리듯이. 의지할 것 없는 바람이 길바닥을 떠도는 작은 나뭇잎을 제 곁으로 데려오듯이. 흘려보낸 목소리처럼 흐릿한 문장 하나를 나무 공 위에 얹어둔다. 보이지 않는 창이 열려 있습니다. 닫힌 것은 열린 것을 필연적으로 끌어당긴다. 나무 공은 비틀거리고 나무 공은 미끄러지고 나무 공은 어제의 낯빛을 기억한다. 희미한 것이 희미한 것 그대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종이 위에 돌멩이. 돌멩이 위에 나무 공. 나무 공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다. 잔디밭의 일요일이었다가. 이름 모를 새가 먹이를 찾는 아침이었다가. 혼자 울고 싶어 길고 긴 길을 따라 걷는 한낮이었다가. 땅 아래 너를 묻고 자꾸만 자꾸만 돌아보는 허공이었다가. 종이 위에 돌멩이. 종이 위에 돌멩이. 피로를 모르는 나무 공이 녹색 잔디밭 위를 구르고 있다. 돌멩이를 쥐고 우는 마음이 있었다. 쓰고 써도 채워지지 않는 백지가 있었다. 너와 나 외에 모든 것이 흐르고 있는 들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