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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한밤의 독서회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그녀는 자살의 방을 개발한 인류에게 감탄한다. 매뉴얼을 입력하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의 병에서 시작해서 몸의 병으로 끝나는 이상한 대화를 하는 모임이다. 누구에게도 이름은 없지만 각자의 벌레들이 테이블 위로 모인다. 딱딱한 껍데기에서 빛이 나서 가끔은 서로를 보며 눈을 감는다. 진흙을 만질 때도 있다. 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태어나는 것이라는데. 손이 짧고 뭉툭하면 병들어도 다른 병을 불러들인다는데. 자살의 방은 누군가의 손이 만들었다. 이상한 것만 쓰고 싶다. 흙 속에 손을 넣고 하나의 덩어리를 꺼내던 자가 말을 한다. 너무 깨끗하게 닦은 테이블에서 벌레들이 미끄러질 때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책을 읽었더니 희귀 병을 얻게 되었지. 이제 시를 쓰려고. 그녀가 중얼거린다. 프로필에 선생 이름만 적어 놓은 의사를 찾아간 그녀가 모임의 중심이다. 나는 어떤 추락으로 벌레들의 행진을 이어가지?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살고 싶다는 것이어서 너무 유치한데. 하지만 나만 혼자 너무 슬퍼하지. 이 모임은 나 때문에 유치해진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이미 좋은 생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녀는 내 말에 헛웃음을 짓다 말고 선글라스를 낀다. 일단 매뉴얼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자는 손이 흙 속에 묻혀 있고 나는 눈을 벽 속에 묻어두었으니 글자를 너무 많이 써서 모두를 병들게 한 네가 제일 문제구나. 그녀는 조금씩 기어가는 나의 벌레를 꾹 눌러본다. 빈 책을 선물하고 선물 받는 일은 그만하자. 기록하려는 욕망은 눈과 손의 일이 아니다. 나는 목이 긴 부츠를 갈아 신고 테이블 위를 걷는다. 부츠가 좋아서 그래. 다리가 아픈 나는 산책을 사랑한다. 조각을 하다 말고 마음을 만지려던 자가 핏빛 덩어리를 가만히 보고 있다. 이상한 것만 쓰려면 어떻게 하지. 이건 어떻게 조각하지. 그자는 홀로 중얼거린다. 너는 좋은 흙이야. 나는 그자의 덩어리를 건너가며 말한다. 모임의 중심인 그녀는 감았다 뜬 자신의 눈에 차가운 빛이 들어오는 것을 깨닫는다. 병들어서 다른 병을 알아보는 것은 상상력보다 슬퍼서 우수한 목발이라고 우리는 각자의 빈 책을 펼친다. 언젠가 벌레만 죽는 시간이 올 거야. 살아남는 것은 진창뿐. 살고 싶은 죽은 매뉴얼은 어떻게 쓰지. 사냥할 수 없는 목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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