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병상 일기만 적고 있다. 아프지 않을 때는 더욱 깊게 적었다. 불타는 창문 아래서 너는 내게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써 주었는데 그런 말은 즐겁고 발랄한 필체여서 나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붉은 옷을 입고 몸에 그려진 땡땡이를 파내고 있는 네가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형태는 사라졌고 재가 떨어졌다. 너는 지금 이 순간이 좋은 거니. 가끔 일기에 적어야 할 말을 소리 내어 말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유에 흠뻑 젖어 하얀 피를 흘렸다. 모두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너는 붉은색 위에 붉은색을 겹쳐 입은 홍당무.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문 닫힌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어서 무서웠지. 서로를 바라보며 수프를 떠먹고 당근을 씹었지. 무겁고 지루하고 그저 그런 말들이 떠다니는 이 도시가 좋아서 너는 사랑에 빠졌다. 휠체어를 끌고 다닐 때까지 우리는 이 병든 도시에서 만나야 해. 나는 내 일기의 끝을 미리 적고 있었다. 작고 날카로운 칼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잠든 그녀를 너는 자꾸만 떠올렸다.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장식용 무기들을 사랑하는 그녀를 너는 병든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사냥당하는 꿈을 꾸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너는 링거를 꽂고 울었다. 땡땡이 무늬가 조금씩 떨어지고 머리에 매달린 푸른 잎이 창문 밖에서 흔들렸다. 불타는 이 도시에서 푸른 잎사귀가 떨어지다니. 나는 이방인들이구나 생각했다. 꿈 같은 건 적어서는 안 된다. 나는 우유를 질질 흘렸다. 길고 가느다란 혀가 바닥을 핥고 있었다. 너는 혀를 사랑하고 부서지는 손가락으로 내 병상 일기를 대신 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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