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감은 눈 속을 헤매고 있다. 식당에서 나온 뒤부터였다. 너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묶는 중이었다. 잠시 차에서 모자를 가져오는 사이에 네가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우리가 앉아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그릇에 좋아하는 반찬을 올려 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던 테이블엔 이미 어떤 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뒷문에는 열리는 문에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 적힌 종이가 빳빳하게 붙어 있었다. 식당 바로 옆에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긴 터널이 있었다.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지만 종종 잠 못 드는 새벽이면 찬바람이 부는 공원을 돌며 너에게 남겼던 음성 메시지. 오늘도 자는 데 실패했어. 해가 뜨는 걸 보면 그제야 눈이 감기겠지. 나는 왜 이렇게 불면증이 심할까. 정오를 넘긴 다락방에 가득 들어차는 햇빛.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어김없이 네게 전화가 왔다. 어젯밤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 볼래? 맨발로 백사장을 밟고 눈을 찡그리는 나의 이마 위로 손차양을 해 주는 너의 모습, 잔디밭에 누워 노을의 냄새를 맡던 여름, 눈발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며 내게서 멀어지는 너의 코트 자락. 메아리로 돌아오는 너의 이름은 누구의 음성이지. 터널 끝에 맺혀 있는 순백의 빛을 향해 걷다가 일순간 모든 소리가 차단된 적막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누군가의 감은 눈 속을 헤집고 있다. 이대로 혈관을 타고 내려가 온몸을 돌아볼 수는 없을까. 여기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터널이 있대. 너는 이미 식당 문을 연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같이 가자고.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 뒤에 뚫린 구멍으로 묶은 머리카락은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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