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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 비의 나라 마른 그릇들이 부엌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것이다 찬장에는 말린 식재료가 담겨 있을 것이다 식탁에는 평화롭게 잠든 여자가 있을 것이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깨워 주세요" 그렇게 적힌 쪽지가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너는 이 모든 것이 옛날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밝은 빛이 부엌을 비추고 있고, 먼지들이 천천히 날아다닐 것이다 그런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선하고 선량한 감정들이 너의 안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기쁨 속에서 너는 국을 끓일 것이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우려낼 것이다 흰쌀밥에서 흐린 김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 너는 무심코 만지는 것이다 평화롭게 잠든 사람의 부드러운 볼을 너는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돌아오지 ..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황인찬 - 새로운 경험 어린 새가 가지에서 떨어진 것을 올려 주었다 가지 위의 새들이 다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시는 아니다 어둠이나 인간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것도 어린 새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다 곧 날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해가 진다 지난밤엔 너 참 인간적이구나,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래도 널 사랑해,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시는 아니다 저녁의 쓸쓸함이나 새의 날갯짓 아니면 이별 뒤의 감정에 대한 것도 "미안, 늦을 것 같아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있어" 누군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고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혹시 누가 보고 있나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김언 - 어느 갈비뼈 식물의 보고서 빗방울과 화석이 만나서 돌이 얼었다가 깨지기를 몇 번 거듭한 뒤 싹을 틔우는 식물이 있다. 이런 식물은 대개 씨앗일 때부터 갈비뼈를 지니는데 현미경의 깨알 같은 눈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그 식물의 내장은 얼었던 싹을 틔우면서 서서히 그리고 미세하게 박동을 시작한다. 맨 먼저 반응하는 것은 물론 심장이다. 시약을 떨어뜨리면 싹이 나오면서 생긴 급작스러운 균열과는 달리 천천히 그러나 거칠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한 식물의 갈비뼈를 만날 수 있다. 너무 가까워서 곧 만져질 것도 같은 그 숨소리는 실은 심장 인근에서 작동하는 호흡기가 틀어놓은 박자를 따른다. 육안으로는 심장의 박동이 더 선명하다. 관찰과 사육을 반복하는 생물학자들 중 일부가 이 식물의 씨앗의 단면을 얻는 데 성공했다. 흔히 식물의 군락지라고 ..
김언 - 토요일 또는 예술가 이런 날이면 한 사람의 내가 시를 쓰는 것이다 한 사람의 내가 말을 걸고 사물은 밖에 있다 내 손은 문밖에도 있다 한 사람의 내가 시를 쓰는 동안 문밖에는 몇 개의 렌즈가 더 있을까 우산은 내가 있고 한 사람의 내가 있고 그가 쓰는 또 몇 개의 렌즈가 즐겨 읽을까, 이걸 시가 아니래도 좋다 온몸이 동공이거나 눈물이라도 좋다 어제는 나를 공격했던 말들이 여기까지 들어왔다 문을 열고는 안에 누구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온몸이 동공이거나 눈물인데도 누구는 있다고 한 사람의 내가 방금 막 썼다 어제는 나를 공격했던 말들이 오늘은 나를 공격하게 만든다 도마 위에 있을 때 생선은 더 잘 보인다 바다에 있거나 민물에 있어야 할 그 몸이 이제는 도마에서 익숙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 고기는 죽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언 - 홀 너무 황홀해서 병원으로 간 두 사나이가 있다. 처음과 끝 -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일대기 우리는 초면이고 우리는 여러 번 악수했고 포옹했고 깊은 얘기를 나눈 뒤에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출신 학교와 고향을 물었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태어났고 같은 시절을 같은 고등학교에서 보낸 감회를 얘기하며 오래 생각에 잠겼다. 너는 그때 어디 있었지? 졸업하고 여기 와서 너를 처음 만났지. 이름이 뭐더라? 내가 불러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처음과 끝 -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해가 질 때까지 예의를 갖추고 적당히 알아듣고 모르는 말은 건너뛴다. 복도를 가르는 음악이 저녁에서 밤으로 경쾌하게 건너뛴다. 병원은 이른 아침부터 불을 켜두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컴컴한 복도에서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악..
김언 - 장례식 주변 잊기 위해서 증오를 한다. 관에서 깨어난 말은 나무 밑에서 뒹굴다가 발가락을 타고 올라온다. 발목은 짧고 내 발가락은 길다. 무척이나 수줍어하던 한 소녀의 발목에서 웃음이 보이거든 기다리지 말고 입을 맞춰라. 잊기 위해서 증오를 한다. 모든 것이 공기로 변하는 상공에서 겨우 십 센티미터 높이의 발가락과 정신이 여기 있다. 내가 비행사라면 너는 광부가 아니다. 내가 돌이고 불덩이라면 너는 석탄이고 재가 아니다. 가만히 서서 불타는 별을 본 적이 있는가 물어보면 여기 있다 대답하는 네가 있어 무서운가. 우습지 않은가. 겨우 붙어사는 것들이 대지에 있고 발바닥에는 없고 발뒤꿈치에 따라붙는 짐승의 울음. 잊기 위해서 장례식 주변에 사람들은 모여 있다. 죄악과 장작더미 속에서 저마다 침울한 방식으로 산 자와 남은..
김언 - 유령-되기 그사이 나는 아프고 늙지는 않았어요 그날의 햇살과 눈부신 의심 속에서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 그게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이 생길 때도 되었는데 얼굴 다음에 표정이 사라집니다 윤곽이 사라진 다음에 드디어 몸이 나타났어요 내 몸이 없을 때 더없이 즐거운 사람 그가 깊은 밤의 명령을 내린다면 내 얼굴은 '아프다'고 명령할 겁니다 그날의 태양과 눈부신 의심 속에서 감정의 동료들은 여전히 집이 되기를 거부하지요 돌, 나무, 사람 들의 데모 행렬엔 누군가 흘러 다니는 내가 있어요 허공과 바닥을 섞어가며 흙발과 진흙발을 번갈아가며 공기가 움직일 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 그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가 문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