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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 날마다 부적이 필요했다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박은정 시집, 문학동네 밤과 꿈의 뉘앙스:박은정 시집, 민음사 [도마뱀출판사]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 문예단행본 도마뱀, 도마뱀출판사

 

 

 이런 얘기가 있지

 옷장 속 벌레를 잡으려다

 벌레를 낳고 말았다는

 혈통 이야기

 

 지독한 어둠 속

 까막눈이 된 할아버지는

 틀니로 저글링을 하며 허우적거렸고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버지는

 밤새 늙은 개와 추도문을 쓰느라

 정작 자신이 할말은 하지 못했다

 똑같은 날씨는 끔찍했다

 변기에서는 계속 물이 새고

 사촌들은 술독에 빠져 출렁였다

 침대에는 만삭의 아내가 꿈틀거리고

 남편들은 애인과 보드카를 마시며

 소설 속 이야기를 제 얘기처럼 지껄였다

 권총을 들고 결투를 하던 호기로움과

 부정한 여자를 겁탈한 위대함에 대해

 

 문을 열면

 안과 밖이 어두워

 날마다 부적이 필요했다 

 고개를 들고 개처럼 짖는 핏줄 때문에

 피뢰침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핏줄 때문에

 

 아이는 사시였다

 눈곱이 낀 인형을 안고

 가시덤불처럼 잘도 자랐지

 이 집에서 구타와 모욕으로

 거식증에 걸린 돼지들은 알았다

 공포와 광기는 한 벌처럼 아름답구나

 테이블 위에는 불탄 책과

 파라핀

 포르말린 냄새

 포르말린 냄새

 

 완벽한 혈통에 실패한 여자가 자신의 배를 찢고

 흔들목마를 타던 아이의 생일마다

 이른 부고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는 불탄 책과

 파라핀

 포르말린 냄새

 포르말린 냄새

 

 진동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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