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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 유형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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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에 버려졌다

 알 수 없는 해변이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알 수 없는 바다 생물의 사체와

 파도에 깎여나가는 돌의 먼지들이

 빛나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하나의 빛살로 보일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내리고 배가 고프고

 밤이 오고 잠도 오는데 인가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이 해변만 밤을 밝혔다

 

 할 수 없이 바다 생물의 사체도 주워 먹고

 모래 굴속에서 잠도 잤는데

 파도 소리가 먼 땅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알 수 없는 해변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살았다가

 죽는 것처럼

 죽게 되고

 살게 되듯이

 

 깨지 않고 싶었지만 나는 깨었고

 알 수 없을 해변이 빛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날리고 눈이 쌓이고

 날리는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고

 회전하는 겨울 속에서 머리카락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미처 찍지 못한 흑점처럼

 

 얼어붙고, 녹아내리는 먼 바다

 파도에 밀려오는 뿌연 빛 사이로

 내가 삼켰던 생물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없는 다리와

 없는 입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울면서

 

 피는 파도와 섞인다

 살은 먼지에 덮인다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굴속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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