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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 풍등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박은정 시집, 문학동네 밤과 꿈의 뉘앙스:박은정 시집, 민음사 [도마뱀출판사]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 문예단행본 도마뱀, 도마뱀출판사

 

 

 바람을 달려간다

 뒤통수에서 열꽃이 파열되자

 아이들의 윤곽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귓속의 바람이 이내 서늘해진다

 늙은 포플러 나무 아래

 온몸 붉게 물들이는 자벌레들

 제 소원을 날려보내며

 명치끝이 뜨거워지는 것도 잠시야

 날아가던 새들이 고개를 떨군다

 먼지 덮인 형광등이 바람에 신음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졸던 늙은이는

 죽기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을 열면 검푸른 구두 소리

 당신과 섹스를 하면 곤란한 기분이 들어

 베롱나무 잎사귀는 오래 흐늘거려요

 알사탕을 빨던 사제가 기도를 한다

 짧고 간결한 체위로 이불을 끌어당겨도

 낡은 침대 스프링은 튀어오르지 않는군요

 쫓기던 아이들이 절벽을 뛰어내리고

 불의 사제를 꿈꾸던 자들의 노래가 들려온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봐

 낙원의 구덩이가 혀를 빼물고 타오르자

 세 치의 소원들이 불속을 걸어나오고

 온몸에 살이 차오른 연인들이

 서로의 심장을 쓰다듬는 시간

 마지막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팔랑거리는 동안

 사제의 담배가 길게 타오른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휘청이던 여자가

 풍등, 새처럼 추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