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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 - 스틸 라이프

 

채식주의자의 식탁:이기성 시집, 문학과지성사 불쑥 내민 손, 문학과지성사 동물의 자서전:이기성 시집, 문학과지성사 사라진 재의 아이:이기성 시집, 현대문학

 

 

 휴일을 기다리며 목이 긴 양말을 신는다. 정오를 지나 서두르지 않는다. 굳어버린 개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 어두운 양말 속에서 발가락이 꿈틀거리지 않는다. 녹색의 들판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식탁 위에 딱딱한 빵과 커피, 푸른 사과의 신맛과 울퉁불퉁한 오후 이웃들에게 안녕, 철수 씨, 아름다운 그림 속이에요! 휘파람 불며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애들을 태운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가지 않는다. 좁은 골목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파의 얼굴에서 침묵의 검은 단추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 노랗게 흔들리는 밀밭 냄새와 검푸른 녹이 번지는 그림 속에서 잿빛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휴일의 긴 여행이 시작되지 않는다. 검게 탄 열매처럼 정오의 허공에서 툭 떨어진 태양, 웅크린 개가 벌떡 일어나 나의 발등을 핥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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