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무 좀 봐.
모든 감각인 잎사귀들 흔들리며 말라가는 소리 들어봐.
나는 이 흰 나무에 밤새 네 그림자를 파고 있어.
이 편지가 네게 닿을까?
내가 눌러쓴 글씨들
검은 낫이 되어 네 손바닥을 뚫고 찢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엽맥들을 분지르며 겨울이 지나가.
모든 감각이 사라진 이 나무 좀 봐.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자라지 않아 이 뿌리들 이제 내 손가락이야.
등 맞대고 앉아 외우던 옛 노래들도 강령들도,
너의 귓속으로 몰래 흘러들게 했던 나의 옛 말들도
이젠 기억나지 않아.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멍청해져.
부러진 나뭇가지로 온종일 나무의 몸통을 쑤셔도 편지는 완성되지 않고.
봐, 나무의 그림자만 선명해져.
나무의 그림자 위에 앉아 있는 너의 검은 눈동자만 선명해져.
나는 도망치고 있던 것일까?
낡은 가죽 소파를 뛰어넘고,
책상 위에 쌓아놓았던 이국의 책들을 뛰어넘고,
밤새 삐걱거리던 침대를 뛰어넘어서.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그리고 왜 내 손은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내가 쥐고 있는 이 흰 종이 구겨지는 소리 들어봐.
종이의 구김에
내 손가락들이 잘리는 소리.
그리고 흰 종이 위에 번지는 붉은 그림자.
멀리 기울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별들의 반짝임.
이게 너의 답장일까?
나의 편지일까?
뿌리 없이도 이 흰 나무 자라나는 소리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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