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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 흩어진 말

 

바나나의 웃음:최호일 시집, 중앙북스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질 때 아니,

 공중으로 흩어진다는 말이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좋았을 때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해도 될까요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어제 산 장난감처럼 꺼냈다 그 말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갔다

 흩어지고 내렸다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그 계절의 비가 왔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을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

 혁명을 꿈꾸기도 했으나 불길한 색상 때문에

 머리가 가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말은 어디로 갔을까

 오후 다섯시에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시간은

 녹슬어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같이

 문득 활짝 열리는 그 말은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았다

 가장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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