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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영 - 허클베리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유계영 시집, 문학동네 온갖 것들의 낮:유계영 시집, 민음사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유계영 시집, 현대문학

 

 

 줄어든 스웨터의 팔다리를 붙잡고 죽죽 늘이는 아침

 혈관 속에서 조용히 팽창하는 것이 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침묵과

 죽은듯이 잊겠다는 침묵

 

 너는 쿠바에서 나무로 만든 새를 보내왔다

 나는 새에게 행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행잉은 조용히 흔들렸지

 창문을 닫아둔 줄 모르고

 

 바람은 흰 종이로 시작했을 것이다

 슬픔이라면 누구의 것이든 묻히겠다는 각오로

 문구점에 진열된 노트의 첫 페이지처럼

 많은 이가 만졌다 복잡한 냄새를 묻히고 왔다

 

 티브이 화면에서는 장수견 찡코가 주름 가득한콧등을 씰룩거렸다

 

 행잉에게는 처음부터 눈동자와 발이 없었다

 그러나 길고 아득한 부리

 너는 이상한 족속을 만난 것이다 슬픔이 고안한 몸,

 그편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벌목공의 미학

 이족 보행에 미치지 못한 나무

 

 바람은 행잉에게서 발생하고 있다

 길고 아득한 부리로 고도를 물어다 옮기며

 스웨터의 씨줄과 날줄 틈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창문을 열자마자 흔들흔들

 날아가는

 흰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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