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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 유목성

 

파의 목소리:최문자 시집, 문학동네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최문자 시집, 민음사 사과 사이사이 새:최문자 시집, 민음사 최문자 시세계의 지평, 푸른사상

 

 

 내 마지막 상상은 유목민의 아내가 되는 것

 아무 절망 없이 게르를 허물고

 아무 희망 없이 천막을 다시 치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 곁을 자박자박 걸어 다니면 저절로 시가 써지는 아내

 

 벽이 없어서 눈물이 되지 않고

 제목이 없어 헐렁헐렁한 그곳

 단추가 생략된 옷을 입은 아내는

 양고기를 굽고 하얀 만두를 빚으며 흰 꽃처럼 점점 무성해진다

 눈물을 가리던 고독한 우산도 쓰지 않는다

 잠시 잠깐

 신에게 그곳 땅을 조금 빌려 사는

 들짐승의 털이 날리는 유목민의 아내

 

 오래전

 몽골 톨 강 지류를 말을 타고 건넜다

 떠내려오는 나무에 물길이 없어지자

 벙어리 유목민이 나를 팽나무 위에 내려놓고 다시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갔다

 유목민의 이별이란 이렇게 성을 쌓지 않고 부득불 톨 강을 건너고 나무다리 위에서 말을 삼키고 서로 다른 지평을 넘는 것

 

 허공 앞에서 암말들이 젖을 흘리며 새끼를 향해 질주했다

 좀처럼 어떤 이별도 되지 않는 곳

 이별 후에도 여전히 보여지는 곳

 

 이곳의 밤은 떠나는 자의 것이다

 뛰어내릴 벼랑이 없는 유목민의 허기를 이해하는 밤

 이곳 포유동물들은 사랑을 안심하고 깊이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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