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들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휘파람을 분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밤이 돌아왔습니다
복도를 지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밤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 길게 하품하는
입속은 한겨울 비닐하우스처럼 후텁지근해
쫄쫄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물에선 약냄새가 진동하는데
낡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밤이여, 오늘은
수용소 문학을 이해할 것 같은 날이기에
소각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위로할 겨를이 없네
꿈을 꾸고
겁을 먹고
토사처럼 몸이 무너져 내려도
나는 영생을 믿지 않고
윤회 또한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이웃들의 침대 위에서
믿음은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누가 저 사람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어?
가래침처럼, 믿음은 왜 저리 끈적한 건지
내 쓰레기통에는 믿음이란 낱말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붉은 십자가의 전원을 내리고
나의 머리맡에 자비를
그러나 나의 기도는 두 손 사이로 미끄러지는 비누처럼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운 밤이여, 창문들이여
잠들었는가, 물끄러미라는 부사가 나를 수식해도
나는 나를 증명해줄 만한 소속이 없네
창밖을 바라봐도 자꾸 내가 흐릿하게 나타나는 건
내 안의 암흑이 깊어지는 탓일까
새벽이 올 때쯤
이웃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기도를 하고
나는 색색의 크고 작은 알약들을 또 입에 털어 넣는다
연기가 흘러가는 쪽으로
비밀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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