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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호 - 회화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홍지호 시집, 문학동네

 

 

 사람을 죽인 거 같다는 심증, 이후로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미술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나무를 그리기 위해 나무를 낭비하면서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는 교실이었다

 

 소설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독자들은 알 것도 같았다

 주인공은 물증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독자들은 알 것도 같았다

 

 몰래 소설을 보면서 나무를 그렸다

 과제를 제출할 때마다 선생님은

 나무여야만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혹은 나무는 왜 나무여야만 했는지

 

 알 것 같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선생님은 왜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그날 꼭 비가 내려야만 했는지 

 

 나무를 서 있는 것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세세한 묘사보다 그림자가 필요했다

 까맣게 칠하다보면 서 있는 것 같았다

 서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명암은 빛에 대한 증거입니까? 나는 빛을 등지고 내가 차지한 만큼의 어둠에게 물었다.

 그늘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증거라는 것이다. 빛은 나를 만져도 나는 빛을 만질 수 없다는,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다는. 나는 불투명이라는. 그날은 왜 비가 내려야만 했습니까? 나는 자꾸 어떤 사람을 죽인 거 같습니다. 죽인 거 같다는 심증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요.

 

 독자들은 알 것도 같았다

 

 과제를 제출하자 선생님은 나무에 비해 그림자가

 너무 크다고 했지만 나무여야만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혹은 나무는 왜 나무여야만 했는지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는 교실에서

 나무는 은유라는 것과

 그날 왜 비가 내려야만 했는지를 알 것도 같았고

 선생님은 죽일 거 같았다

 소설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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