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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양 모양의 수면 양말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도저히 눈이 안 감기는 밤, 창밖 골목에선

 버려진 양말 몇 켤레 얼어 가고 있었다

 한때 누군가의 발을 따뜻하게 해 준 기억이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얼어붙고 있었다

 

 아무리 감아 봐도 눈이 자꾸 안으로 떠지는 밤,

 내가 헤아린 수천수만의 양 떼들이 부풀고 있었다

 각막처럼 얇은 목장을 찢고서

 두둥실, 더러운 눈 온몸에 묻힌 채

 온데만데 떠오르고 있었다

 쓸어 놓은 눈들은 무슨 포대 자루처럼

 발로 차도 끄떡없는 무게로 굳어 있었고

 

 누가 주워 가기엔 양말이 너무 싸구려지만

 그런 양말을 주워 갈 사람도 있을 거란 상상이

 골목을 비참하게 한다

 너를 녹여 주고 빨아 주고 말려 줄 사람이 다시

 너를 두 발에 신고 다닐 거란 망상의 온도가

 골목을 쪼그려 앉아 우는

 한 사람의 남자로 보이게 하고

 

 같이 쪼그려 앉아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거꾸로 벗어 놓은 양말 안에서 하나둘씩

 양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음처럼 메헤헤헤헤

 하얗게 울면서 흘리는 양들의 뜨거운 침이

 딱딱한 포대 자루에 뻥 뻥 구멍을 뚫고 있었다

 

 당신의 오래된 입 냄새 속에서 익어 가고만 싶었는데

 낡은 베개처럼 삭아만 가는 밤,

 꿈나라는 풀려난 양들이 밤새 이동한 거리만큼 광범위해져 있었고

 양들은 다들 각자의 위치에 정지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건 모두 한 장의 사진에 가까웠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들 졸고 있었다

 내가 함부로 꾸어 온 꿈들이 주인 몰래

 주인도 모르는 곳에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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