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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바톤 터치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해 지고 하산할 때, 어둠에게 넘겨주는 기분

 아름다운 능선을 따라 웃고 떠들고 힘차게 전진하던 우리였건만

 지금 어둠으로 넘겨지는 기분

 바톤 터치

 통째로 빼앗기고 통째로 되돌려 받는 기분

 겨울 산행은 역시 해 지고 내려가는 재미

 까지고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어떤 게 바위의 살이고 상처인지 대체 누가 알 수 있겠어

 우리 몸을 통째로 빌려 하산하는 산이 고맙고 무섭다

 산이 넘겨준 건 술잔에 몇 번씩 부었다 비워도 해결이 안 되고

 산에 넘겨주고 온 건 지금도 석굴의 불전함 한구석, 같은 데서 덜덜 떨고 있겠지

 까마귀 울음도 그치고

 수정궁엔 군만두도 떨어져서

 우리는 떨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도

 우리가 두고 온 우리는 홈리스

 차가운 바위가 빼앗아 간 온도는 잠시 바위의 표면을 맴돌다 바위의 내부가 되어 잠들고

 까마귀들은 여기저기 버려진 우리들을 물어다가

 내년에도 멋진 둥지를 짓게 되겠지

 그러니 우리보다도

 우리가 두고 온 우리가 장수하지 않겠느냐

 저 산보다도

 저 산이 우리에게 넘겨준 산이 우리 안에서 더 장수하지 않겠느냐

 홈리스

 우리는 한참 덜떨어져서 산을 통째로 데리고 내려온 사람들

 비정규위험탐방로를 데려와

 한 어둠에서 한 어둠으로 넘어가 보는 재미

 꿈에서도 낙석 주의

 감당하지 못할 것들 감당하다 보면 그것들이 언제부턴가 나를

 감당하고 있었음을 본다

 봉우리 정상의 까마귀들 세찬 바람 속에 정지해 있다  

 그대로 활공!

 커다란 날개 접고 전속력의 검고

 커다란 포탄처럼 몸 던지는 걸 본다

 영혼의 심층부를 폭격할 권리

 우이암 끝자락에 우리를 눈처럼 재워 둔 채

 꾸짖고, 찢어 버렸다

 겨울 하늘을, 백지장처럼

 생각건대 우리의 고통은 오직 우리만의 것이니 우리보다 작을 것이 분명해서

 산꼭대기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우리는 끄집어내

 후두둑 떨어져 잠 깨는 적설처럼

 목에다가

 훌훌 

 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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