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유원 - 인벤션

 

밀크북_2 세상의 모든 최대화, One color | One Size@1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 황유원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4)[ 양장 ] 예언자, 민음사 일러스트 모비 딕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장편소설, 문학동네

 

 

 아주 깊은 기타 한 소절 정성 들여 친 후

 거기 고립되기 좋은 밤이다

 그 속에 밤새 눈을 내리게 한 후

 철저히 나 혼자 되어

 밤새 눈 내리는 소리나 듣게 하기 좋은 밤

 거기 어울리는 건

 망가져 땔감이 된 클래식 기타 타들어 가는 소리

 불길에 공중이 녹아들어

 열차처럼 기이-ㄹ게 휘어지는 소리밖에 없고

 거기 낡은 양은 냄비 하나 올려 놓고

 방금 퍼 온 새하얀 눈 한 움큼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나의 깊은 침묵을 얹기 좋은 밤이다

 고립은 참 안 좋은 말이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때로 필요한 건 고립이어서

 고립과 짝이 되어 이렇게도 한 밤 지새워 볼 일인데

 창밖으론 눈으로 만든 양 떼들이 온다

 사람과 하나도 안 똑같은 눈사람이

 눈과 끝없이 하나 되어 가는 밤 

 숨죽인 채 발견되는 메모 같은 것

 그 메모의 여백 같은 눈송이들이 한 줄 두 줄 울다

 한 장 두 장 울기도

 아예 (상), (하)권으로 울려 버리기도 하는 밤

 고립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소리

 오로지 마음만을 반영하는 악기의 한 소절이

 두꺼운 고서 한 권의 냄새로 깊어져 방 안 가득

 퍼졌다가

 조금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슨 빛이나

 소금처럼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다

 한 번쯤 혼자 조용히

 죽어 보기 좋은 밤

 나는 지긋지긋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들로부터

 몰래, 빠져나가 본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유원 - 논스톱 투 브라질  (0) 2020.11.22
황유원 - 매달린 것들은 다  (0) 2020.11.22
황유원 - 세상의 모든 최대화  (0) 2020.11.22
황유원 -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0) 2020.11.22
황유원 - 돌고래시  (0) 2020.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