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깊은 기타 한 소절 정성 들여 친 후
거기 고립되기 좋은 밤이다
그 속에 밤새 눈을 내리게 한 후
철저히 나 혼자 되어
밤새 눈 내리는 소리나 듣게 하기 좋은 밤
거기 어울리는 건
망가져 땔감이 된 클래식 기타 타들어 가는 소리
불길에 공중이 녹아들어
열차처럼 기이-ㄹ게 휘어지는 소리밖에 없고
거기 낡은 양은 냄비 하나 올려 놓고
방금 퍼 온 새하얀 눈 한 움큼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나의 깊은 침묵을 얹기 좋은 밤이다
고립은 참 안 좋은 말이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때로 필요한 건 고립이어서
고립과 짝이 되어 이렇게도 한 밤 지새워 볼 일인데
창밖으론 눈으로 만든 양 떼들이 온다
사람과 하나도 안 똑같은 눈사람이
눈과 끝없이 하나 되어 가는 밤
숨죽인 채 발견되는 메모 같은 것
그 메모의 여백 같은 눈송이들이 한 줄 두 줄 울다
한 장 두 장 울기도
아예 (상), (하)권으로 울려 버리기도 하는 밤
고립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소리
오로지 마음만을 반영하는 악기의 한 소절이
두꺼운 고서 한 권의 냄새로 깊어져 방 안 가득
퍼졌다가
조금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슨 빛이나
소금처럼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다
한 번쯤 혼자 조용히
죽어 보기 좋은 밤
나는 지긋지긋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들로부터
몰래, 빠져나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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