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가라. 가고 있어. 지우개지옥을 지나. 바구니지옥을 지나. 무성한 잡념을 헤치며. 반목의 뉘앙스를 견디며. 더듬었다. 끈적였다. 내가 자초한 것들. 자초지종이 없는 것들. 만지면 묻어나는 것들. 긁으면 피가 나는 것들. 불쾌한 재능의 뻘밭에 발이 빠졌고. 능동태의 숲에서 누더기가 되었고. 어서 가라. 가고 있잖아. 오류의 빛. 은혜의 밤. 만주 벌판을 본뜬 황량한 천국의 신기루에 눈이 멀었고. 오호츠크해를 떠도는 젖은 유령의 흐느낌에 기가 질렸고. 검은 삼각주에는 모서리가 없었고. 표면도 없었고. 방위는 무너졌고. 지도는 너덜거렸고. 괜찮습니다, 내 기분은 갱지가 아니라서 쉽게 찢어지지 않을 줄 알았지. 위도와 경도를 초월하여. 자르는 선을 따라 접고. 접는 선을 따라 지우고. 지우개지옥을 지나. 금 시대와 은 시대를 도약하여. 바야흐로 알미늄 시대에 닿을 것처럼 가볍게 구겨질 수 있을 줄 알았지. 바구니에 버리면 될 줄 알았지. 뒤집어쓴 바구니. 바구니의 목소리. 어서 가라. 제발 가라. 애원의 높낮이를 따라 뒤틀리는 것들. 의혹의 습도를 따라 말라붙는 것들. 쥐가 났다. 뜨거웠다. 해석의 가장자리를 따라 덧나는 것들. 환멸의 끝에서 충혈되는 것들. 간헐천이 끓었다. 속옷을 빨았다. 화상을 입었다. 불가능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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