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이라는 이 꿈을 주관하는
명확한 우연이나 은밀한 법칙이 바라네.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을 품에 보듬는
아, 필연적이고 달콤한 조국.
조국이여, 너를 이런 것들에서 느꼈네.
드넓은 아라발의 허물어지는 일몰,
팜파의 바람에 현관까지 쓸려 온 용설란꽃,
수더분한 비,
천체의 느긋한 습성,
기타를 뜯는 손,
영국인들이 바다에 그러하듯
우리네 피가 멀리서도 느끼는
대평원의 인력,
어느 납골당의 자애로운 상징과 병 모양 장식,
사랑의 미약 재스민,
틀 가장자리를 두른 은,
은은한 마호가니의 부드러운 감촉,
감칠맛 나는 육류와 과일,
어느 병영의 푸르스레하고 하얀 깃발,
비수와 길모퉁이에 얽힌 무욕의 역사,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꺼져 가는 늘 똑같은 오후,
주인들의 이름을 딴
노예들이 있는 정원에 관한
아련히 유쾌한 기억,
불길이 흩어 버린
장님용 책자의 가련한 낱장들,
누구도 잊지 않을
9월의 서사적 비,
하지만 이들도 너의 양태와 표상의
극히 일부일 뿐.
너는 광대한 영토,
기나긴 역사 그 이상이며,
파악할 수조차 없는
모든 세대의 누적 이상이라네.
영원한 원형들이 살아 숨 쉬는 신의 품안에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네.
하나 너의 아련한 얼굴로 인해
우리가 살고, 죽어 가고, 갈망하네.
아, 저버릴 수 없는 신비스런 조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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