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제니 - 흐른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하늘은 먹구름이다. 나무는 그림자다. 공은 허공에 떠 있다.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바닥에 닿기 직전이다. 나무가 되기 직전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백이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꽃잎이 떨어진다. 이제 무엇이 오면 좋을까요. 물이 오면 좋겠어요. 말이 오면 좋겠어요. 말라가고 있었거든요. 물러나고 있었거든요. 분수대 뒤에서 홀로 울고 있는 것은 낯모르는 아이. 여름으로 향하는 것은 그칠 줄 모르는 잎사귀와 열매들. 너는 떨어진 꽃을 주워 꽃잎 점을 친다. 하나 둘. 하나 둘. 바닥에는 분필로 그린 사람이 있다. 누워 있는 사람 곁으로 공이 떨어진다. 떨어진 공 곁으로 꽃잎이 떨어진다. 흐르는 공 곁으로 꽃잎이 흐른다. 이제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요. 연필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어요. 제대로 처음처럼 쓰고 싶어졌거든요. 마지막을 마지막으로 지우고 싶어졌거든요. 영원히 나아가는 먹구름이다. 푸른색이 열리는 하늘이다.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건너가면 좋겠어요. 넘어가면 좋겠어요. 울고 싶어졌거든요. 살고 싶어졌거든요. 그림자가 지워지는 바닥이다. 흐르는 공 너머로 다시 깊어지는 여름이다. 공은 허공을 떠나고 있다. 꽃은 그림자로 맺힌다. 너는 의자에서 일어선다.